백합/오늘의 강론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수성구 2022. 9. 9. 06:23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수도원장과의 면담 때에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도자로 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열심히 수도 생활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침대를 바꿔주세요.”

수도원장은 곧바로 침대를 바꿔주었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부실해서 식사 때마다 고역입니다. 음식에 신경을 써주세요.”

수도원장은 최대한 그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나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제가 지내는 방이 열악합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원하는 방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 번째 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말 한마디 못 하니 너무 답답하고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바꿔 달라는 대로 다 바꿔주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바꾸어 보세요.”

우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바뀌길 원합니다.

남편이 바뀌길, 아내가 바뀌길, 자식이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그러나 여기서 늘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자신을 먼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행동과 마음속 생각의 불일치를 이루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라는 호칭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라고 성을 내면서 말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사랑해라. 행복한 순간은 늘 ‘앙코르’를 원한다(파스칼 브뤼크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