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한디?”
1코린 7,25-31; 루카 6,20-26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2022.9.7.;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과 독서에서 초점이 하나입니다. 인생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세간에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우의 사랑은 대개 받는 사랑이고, 그것도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받을 생각만 하지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세간의 사랑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란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경계선일 뿐이라고 전제하신 다음,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이고, 그것도 우리가 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다른 이들에게 베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받게 될 사람들 즉 가난하고 지금 굶주리고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리라고 선언하시는 한편, 반대로 사랑을 줄 줄 모르고 거부한 사람들 즉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는 사람들은 불행하게 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받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데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주고자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에게 나타나는 기본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외된 나머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즉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고 또한 그러다가 미움을 받고 쫓기고 모욕당하고 중상까지 당할지라도 오히려 기뻐 뛰놀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당신 대신 베푼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운명도 그러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나눌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재산을 모으기만 할 뿐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재산을 나누어 쓸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달리 주실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사랑에는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에 가서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실제 그분의 삶에서 우러나온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시는 이 대목은 문장이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과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이 날카롭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긴장감이 묻어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서 사랑을 나누어 주시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 병고를 앓던 이들이 그분께 와서 치유를 받았고, 마귀 들려 고생하던 이들도 그분께 와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또 그분은 굶주리던 사람들을 위해 빵의 기적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 먹고 다시 배고파질 빵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을 주셨으니, 그것은 당신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 때마다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는 사람들을 만나시면 진심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 이르셨을 때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죽은 그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루카 7,12-14). 어린 딸이 죽어서 슬퍼하는 회당장 야이로에게도 그분은 그 딸을 다시 살려주심으로써 위로해 주셨습니다(마태 9,18-26).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사도가 되어서 예수 부활을 선포하고 다니자 대사제가 그들을 붙잡아서 매질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을 물러 나왔던 일(사도 5,41) 그들이 비로소 스승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게 해 줍니다. 스승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삶은 바로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었음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부활하는 삶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으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이는 사도 바오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교우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또 우리가 영위하는 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위를 차지해야 할 일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관심을 현혹시키는 기혼이나 미혼 여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많고 적음의 여부 등 사라져 가는 덧없는 이 세상의 조건들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집중하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을, 그것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을 본받아서 나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주는 사랑을 권고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 귀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주는 사랑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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