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악에 물든 세상, 선에 몰두해야 할 인생

수성구 2022. 9. 6. 06:34

악에 물든 세상, 선에 몰두해야 할 인생

1코린 6,1-11; 루카 6,12-19 /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2022.9.6.;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로 양성할 제자 열두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신 것을 보면 아주 고심하며 고르신 것 같습니다. 당신을 돕고 계승할 하느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으로 인류 문명을 밝힐 새로운 인류의 첫 무리가 이렇게 해서 출현했습니다. 

 

  가장 먼저 간택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친형제지간이면서 제자단을 이끈 리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초기에 불림을 받은 제자인데 서로 친형제지간으로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숨 바쳐 순교했고 요한은 에페소 교회를 맡아 일생을 바쳐 선교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마태오와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등도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특히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마태 13,55). 마지막으로 스승을 배신한 이스카리옷 유다는 죄책감을 못이겨 자살했는데, 초대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이 그의 자리를 채울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고 마티아가 뽑혔습니다(사도 1,15-26).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는 것입니다(마르 3,14ㄴ). 후대의 제자들인 우리로서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사제직, 몸과 말과 글로써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자 직무, 그리고 구마와 치유의 사도직 같은 봉사의 활동으로써 사람들을 돕는 왕 직무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지파 수와 같은 열둘로 구성되었다는 점 역시 제자들이 행할 사도직이 새 이스라엘로서, 악에 물든 세태와는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해 줍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악에 물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신 세상은 안타깝게도 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카인의 후예들이 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얻자고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려고 위장을 하느라고 또 죄를 지으며, 그러다가 들통 나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덜 나쁘다고 우기느라고 다시 더 죄를 짓고 마는 한심한 세태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픕니다. 이들의 송사에 동원되는 영악한 법 기술자들에 의해서 종종 선과 악이 뒤바뀌기도 다반사여서, 무죄한 사람이 죄인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죄인이 무죄로 풀려나오기도 합니다. 모두 다 돈의 힘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우들에게 서로간의 다툼이 있을 때 세속의 법정에게 판결을 구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느님 선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 세상을 심판하라는 역할을 하라고 불리웠기 때문입니다(루카 22,30). 

 

  하느님 심판의 대행자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맡은 역할은 선으로 악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고 또 몸소 행하기도 하셨던 방법으로서, 악에 대하여 선으로 맞서서 승리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힘주어 강조한 바 있습니다(1코린 1,24).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억울하게 악의 공격을 받을 때 섣불리 같은 방식으로 대항하면 십중팔구 당하고 맙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훨씬 영악하기 때문입니다(루카 16,8). 그러니 악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말고 악이 공격해오거나 괴롭히려 들면 더욱 선한 방식으로 맞서든지 혹은 그게 어려우면 차라리 지고 마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쨌든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선을 야무지게 부여잡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다양한 처세술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지혜보다 더 거룩한 처세술은 없습니다. 그래서 악이 접근해 올 때 오히려 이를 발판으로 삼아서 더 큰 선에로 도약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악인들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다가도 제 꾀에 제가 걸려 넘어지기 마련입니다(시편 141,10; 잠언 14,32; 이사 3,11). 그래서 악인의 운명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시편 1,4; 지혜 5,14). 

 

  박해시대 우리 신앙 선조들은 상선벌악의 윤리를 배웠으므로 그 시대의 악인들이 때리고 찌르며 죽이기도 하면서 미워할 때에도 그들의 악행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알았기에 묵묵히 매질 당하고 칼로 목베임 당하여 죽는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으로 가득 찬 이 고난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지리라는 것도 믿었으며 그리하여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나타난 그 부활 신앙의 실체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이며 이를 바탕으로 누구나 자아를 실현하고자 차별없이 노력할 수 있게 된 세상인가 하면, 이 자아실현의 결과로 세상이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상태대로 선하게 변화될 수도 있게 된 현실입니다. 그래서 본래대로 세상을 선으로 변화시켜 놓아야 할 우리는 선에 몰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세상이 선하게 변화되기 전에 미리 그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밤 새워 기도하며 부르신 열세 번째 제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