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6. 24. 05:53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다해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냈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오늘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사제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며 성덕을 쌓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사제들을 위해서도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

 

복음: 루카 15,3-7: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6) 한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 현존을 통해, 인간적 마음을 통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착한 목자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이다. 이성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고 비판한다. 이성적으로는 옳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우정 관계,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과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의를 인정하고 공범자가 됨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목자의 행동은 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양에 대한 큰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비판의 여지가 있고, 또한 하느님께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을 잃어버린 목자처럼 행동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7절) 하느님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즉 이성적으로는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구원하러 가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계산하시지도 따지지도 않으신다. 이성적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팔을 벌리실 뿐이다. 우리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비이성적인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아무 죄 없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보통 죄인들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 그들을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바오로 사도는 주장한다. 이성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사람은 죽음이 불가피할 때 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사랑, 자격이 jqt는 죄인들에 대한 자애의 관점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8) 예수님은 성체성사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정신 나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충만한 믿음과 감사의 정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바오로 사도는 이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그 지나친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도 이성적이 아닌 열정적이고 어리석은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사랑을 살려고 결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이성적이 아닌, 정신 나간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우리의 사랑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