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수성구 2022. 6. 23. 02:12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1-6; 사도 13,22-26; 루카 1,57-80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2.6.23.; 이기우 신부

 

  일찍이 메시아의 출현을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는 ‘민족들의 빛’(이사 49,6)이 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이라고 알아보았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도 전이라서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는 물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요한은 이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이며 “그분은 갈수록 커지실 것이지만 자신은 갈수록 작아질 것”(요한 3,30)이라고 한껏 낮추었습니다. 갈수록 작아진 가치는 정의였으며, 갈수록 커진 가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치가 모두 이사야나 요한이나 예언자가 광야와도 같이 가치가 메마른 황량한 인류 역사에서 민족들을 진리의 빛으로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의와 사랑의 가치가 어둠을 비추어 인류의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으로 창조하고 ‘사랑의 문명’(간추린 사회교리)을 이룩할 하느님 섭리의 빛이었습니다. 어둠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대신에 섬기는 이 힘은 우상처럼 군림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신 요한 23세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여 사목헌장의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 힘을 정의롭게 또 사랑을 위하여 쓸 줄 모르는 사이에 인류 사회는 무법천지처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내밀한 마음 속에 섭리적 질서를 새겨주셨는데, 이것이 양심을 일깨워 정의와 사랑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 머리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세상의 질서는 조화와 균형입니다. 공동선을 기준으로  책임에서 자유가 나오고, 의무에서 권리가 발생합니다. 개인도 집단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율의 최대한과 최소한을 이 기준에 적용하면,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자유와 권리를 선용하는 것이 최대한이고, 적어도 우리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여 다른 이들의 자유와 권리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최소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거슬러 책임지지 않는 자유를 내세우고, 의무를 소홀히 한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이 세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패권을 추구하면, 제국주의 세력이 됩니다. 백 년 전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빼앗을 때에도, 70여 년 전 남북으로 나라가 분단될 때에도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세력들이 야합하여 결정해 버렸습니다. 힘의 논리로 움직여지고 있는 한반도의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여 우뚝 서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나 국민들의 삶에 대해서 또 민주주의 질서에 있어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라 자유와 권리를 선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시민들 각자가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더 지향해야 할 바는 정의로운 삶을 기반으로 사랑의 삶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자면 박해받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꿈꾸었던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하는 삶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회생활에 있어서 책임과 자유, 의무와 권리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복음화를 지향하는 마음으로 자기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을 정의와 사랑의 가치에 있어서도 살아가면, 우리 교회도 민족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머지않아 민족의 화해와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이 민족들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미 세계 유수한 대학의 석학들이 그러한 밝은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힘을 추구하면서만 살아온 이웃 나라들이나 강대국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을 닮지 말고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한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