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도, 바르나바

수성구 2022. 6. 11. 05:32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도, 바르나바

사도 11,21-13,3; 마태 10,7-13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022.6.11.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예루살렘 시대와 소아시아 시대를 이어주는 인물이고, 열두 사도단과 바오로 사도를 이어준 인물입니다. 그는 해외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다인으로서 키프로스 태생이었는데, 그가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하러 왔다가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이 보여주는 공동생활에 감명을 받아서 신자가 되었고(사도 4,36-37), 사도단의 신뢰를 받아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로 파견되어 사목 책임도 맡았습니다(사도 11,22).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스테파노로 인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이 개척한 공동체로서 스테파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베드로를 따르던 예루살렘 신자들보다는 복음에 더 충실하려는 경향을 띠었고 선교 의식도 뛰어났던 듯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알아듣는 능력에 있어서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공동체의 신자들이 박해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섰으며 고향에서 자숙하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주어서,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서 사울을 데려와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사도 11,25). 그 무렵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예루살렘에 큰 가뭄이 들자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모금을 했고, 바르나바와 사울로 하여금 이 모금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사도단에 전달하도록 했는데 이 때 자연스럽게 바르나바는 사도단에게 사울을 소개하면서 덩달아 신원보증도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11,28-30;12,25).  

 

  그러다가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이렇게 해서 바르나바와 사울에 의한 소아시아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은 선교 활동에 앞서 히브리식으로 불리는 대신 그리스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바오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 역사상 첫 공식 선교 활동이 바르나바와 바오로, 이 두 사도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초대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다 땅을 떠나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바르나바는 자신의 고향인 키프러스에 복음을 전했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만나서 데리고 온 마르코를 수행시킴으로써 복음선포에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사도들에게 문제를 제기하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사도들의 전체 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문제란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해 주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할례 논쟁을 주제로 열린 사도회의에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함께 참석했지만, 기성 사도단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이방인 선교에 유리하도록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단에 알려지지 않았고 박해자의 전력까지 있었던 바오로보다는 아무래도 이미 신뢰를 받고 있었던 바르나바의 역할이 더 컸을 것입니다. 기성 사도단에서 결론을 내릴 때 가장 크게 참고했던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즉,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사도 15,26)이라고 안티오키아와 다른 이방인 출신 신자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서 쓰고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 이후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마르코 때문에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섰지만, 바오로가 2차와 3차 선교여행을 하고 그때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로 돌아와서 보고를 하기도 했어도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변함없이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지원해 주었고, 바르나바가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개입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으며 비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바르나바는 선교의 주도권을 원만하게 바오로에게 넘겨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과 신원보증인 노릇을 충실히 한 것만으로도 초대교회 역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또한 1차 선교여행에서 떨어져 나간 자신의 조카 마르코가 그 이후의 선교여행에 동행하지 않고 예수를 만났던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취재활동을 했는데, 그 결과로 그는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을 주체로 하는 복음서 양식을 선보였으니, 이것이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이 역시도 마르코가 바르나바의 제안으로 바오로와 함께 하는 선교여행에 참가했었던 경험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던 바오로를, 과거의 동지였던 바리사이들도 그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어 피했고, 미래의 동지가 될 그리스도인들도 아직은 미심쩍어서 그를 피하고 있던 시절에, 오직 바르나바만이 은인자중하려던 그를 찾아가서 설득하고 격려하여 사도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하여, 사도행전에서는 바르나바에 대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예루살렘 공동체에 왔을 때, 자신이 소유한 밭을 판 돈을 사도들에게 봉헌했는데, 이러한 행동이 사도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던지 사도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지어주었으니 그 이름이 ‘바르나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