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부활 제3주일] 살해된 어린양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수성구 2022. 5. 1. 04:24

[부활 제3주일] 살해된 어린양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살해된 어린양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사도 5,27-41; 묵시 5,11-14; 요한 21,1-19

2022.5.1.; 부활 제3주일; 이기우 신부

 

1. 말씀의 흐름

부활 제3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여러 상황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번에는 단지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사도로 진급시키고 그들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날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보면, 과연 제자들은 이전의 비겁하고 소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가 되어 대사제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5,30).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박해와 수난에 대해서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지상에서 진리를 위해 의인들이 당하는 수난이 지니는 영적인 의미와 품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천상에서 전례가 거행되는데, 악인들의 계략과 죄인들의 방관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이제 권능과 지혜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천상의 성인들이 입을 모아 찬미하는 것입니다. 

 

2. 변화무쌍한 사람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거나 이익을 도모할 때 똑똑해집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완전범죄를 기획했었습니다. 군중이 집에 돌아간 어두운 밤을 틈타서 밀고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이 그러했고, 혁명당원들과 야합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빌라도를 윽박질러 정치범에게나 내리는 십자가형을 예수님께 언도하도록 유도해 낸 과정이 그러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무덤이 비게 되자 이 빈 무덤이 부활의 징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시신을 훔쳐가서 무덤이 빈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라고 경비병을 매수하여 여론을 날조하고자 나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로 이 모든 범죄 기획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이 부질없이 저지르는 일들이 이렇습니다. 

 

  또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던 여러 사람들도 머리를 많이 썼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보려고 강아지도 주인이 상에서 흘린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는 기발한 논리로 예수님의 양보를 이끌어냈으며, 로마인 백인대장은 죽을 병에 걸린 자기의 유다인 종을 고쳐 주기 위하여 군인다운 충성심과 극진한 예우로 예수님을 감동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께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갈릴래아 호수를 거의 반바퀴나 돌아서 그 먼 거리를 쫓아오기까지 했었습니다. 눈 앞의 이익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물겨운 구석이 있습니다. 흔히 얻을 이익보다 더 큰 희생을 바치곤 하기 때문입니다. 

 

3. 깨달음에 굼뜨고 무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딱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자기가 종사하던 생업이 있었고 가족과 이룬 가정도 있었는데, 이를 버리고 따라나섰지만 결단에 따른 기대가 너무 커서 계산을 하느라고 바쁜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하시며, 숱한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은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현세적 이익과 출세였습니다. 그러기에 스승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던 당시에도 서열 다툼을 일삼았고 정작 스승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자 믿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부활시기를 맞이하면서도 도무지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제자들에게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대책

악인들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십자가 수난이었고,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부활이었으며, 제자들에 대한 대책은 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후속 대책을 마련하셨으니 이것이 오늘 복음의 상황입니다. 일단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불러 모으셔서 풍어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한편, 제자들의 으뜸으로 삼으신 베드로는 따로 독대를 하시며 신앙을 확인 점검하셨습니다. 이 기적과 독대가 그분의 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이익을 도모하느라 어지러운 상황을 완성하시려는 사랑의 심판입니다. 의로운 사람을 그 의로움에 그치지 않고 거룩하게 성숙시키시어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할 만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구원의 심판입니다. 죄악의 혼돈 속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는 창조의 심판입니다. 

 

5. 지상의 혼돈, 천상의 전례

복음서를 쓰기 전에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에페소를 비롯한 일곱 교회에 복음을 전하다가 황제의 상에 경배하라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거부한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외딴 섬에 갇혀서 채석장 중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같은 박해를 받고 있는 일곱 교회 신자들이 걱정되어서 틈틈이 동굴에 가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묵시록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에 그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의 수난도 목격했거니와 그 자신도 똑같은 수난을 당하게 되자, 그 수난의 영적인 의미를 한결 수월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묵시록의 4,5장은 지상에서 의인들이 겪는 수난이 천상에서는 거룩한 전례로 그 의미와 품위를 선포하는 것임을 믿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기록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어좌에 앉아 계시고, 복음을 증언했던 의인들을 상징하는 네 생물 즉 사자와 황소와 사람과 독수리가 찬양하며 수난을 겪고 순교한 무수한 신자들이 찬미하는 목소리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12-13).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로지 천상의 관심사이며 이 일들을 선과 악으로 분별하고 그 중 선한 일에 대해서는 천상에서 전례로 거행함을 요한은 알려주었습니다.  

 

6.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

그러니 사도 요한이 천상에서 거행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기도 소리를 현실의 박해 상황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사도로 거듭난 제자들도 더 이상은 대사제와 유다교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살리셨다고 그 살벌한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그네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대놓고 공개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천상에서 전례로 찬미할 만한 지상에서의 영적 전투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군다나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사제는 사도들을 매질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나서 풀어 주었습니다. 

 

7.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은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만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사제로부터 매를 맞고 공갈 협박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고 나서도 기뻐하며 최고의회를 물러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자격이 이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의 이런 모습은 대사제와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정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후대의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이런 심리 상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죄를 뉘우치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도덕적 부채의식을 느낄 만큼 사도들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또 달리 보자면, 그만큼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8. 나를 사랑하느냐?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만나셨습니다. 풍어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사도직 소명을 새로이 다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둘러 서 있는 가운데, 독대 아닌 독대로 신앙을 고백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두 가지가 특별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라고 당신이 이름지어주신 대로가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호칭을 부르신 뜻은 이제까지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 즉 당신을 믿느냐고 고답적으로 묻기보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인격적으로 물으시면서, 그 자리에 둘러있는 다른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베드로의 마음을 배려하신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와 예수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조차도 기뻐할 만한 자격이라고 생각하게 된 변화였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라면 백쉰세 마리로 상징되는 선교적인 풍성한 성과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다짐을 세 번이나 받으시고 다음의 한 말씀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 낚으셨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