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대림 제2주일: 가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19. 12. 8. 03:10

대림 제2주일: 가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조욱현 신부 강론

       

 

 

대림 제2주일: 가해: 회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회개에 대한 것이다. 독서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회개의 개념이 얼마나 깊고, 항상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께 집중되고 있다.

 

1독서: 이사 11,1-10: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1독서는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가 인간들 가운데 성취시킬 변화의 놀라운 위업을 예고하고 있다. 그분은 정의를 다시 세우실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평화를 다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영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이사 11,1-9).

 

이같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시적 표현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쇄신과 평화의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전환시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외침으로 장식되고 있다. 그 외침은 낙타 털옷과 같이 껄끄럽고 광야의 돌들과 같이 거친 모습이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2-10). 결단을 하여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보다 더 큰 권능을 가지신 어떤 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11-12). 이는 종말의 심판의 표현이다. 즉 요한은 구원의 소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때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알려줄 뿐이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세례자 요한의 역할과 가르침을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의 크리스챤적 사명을 알아듣게 되었고, 그를 곧 임하실 메시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증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오늘도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다. 1) 그의 인품을 통해, 2) 그의 가르침을 통해, 3) 그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세례의 정화예식을 통해서이다.

 

1)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은 권위 있는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은 초대교회에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에게 알려야 했던 신비스러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이 구원의 선포자를 세례자 요한으로 확인하였다.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닦아라’”(이사 40,3). 또 세례자 요한은 금욕적 생활의 특성 때문에 엘리야와도 관련하여 생각하였다. “가죽으로는 아랫도리를 가리고 몸에는 털옷을 걸친 사람이었습니다.”(2열왕 1,8). 히브리 전승에는 메시아 예고자로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말라 3,23).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예수께서도 요한에 대해 언급하신 후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시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마태 11,14).

 

즉 요한은 이러한 사명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바친 정렬에 비추어 보아서도, 자신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신발을 들고 다닐자격도 없는 자기이지만, 주님을 알리는 겸손하고도 기쁨에 찬 그의 자세를 보아서도 그의 인품이 우리를 저절로 주님께로 인도해 준다.

 

2) 그의 가르침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2). 회개’(metánoia), 정신과 감정과 생활의 완전한 변화의 의무를 모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이 회개라는 진정한 노고를 면하게 해줄 수는 없다. ‘올바른 자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을 가진 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7-9).

 

예수님의 메시지도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와 똑같은 말로 시작되고 있다(마태 4,17).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연속성이 있고 복음의 본질 자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변화되고 쇄신된 생활의 증거만이 우리가 진정 모든 착각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3) 세례자 요한은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그런데 요한은 그 세례가 단지 잠정적이며 암시적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나는...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1). 이렇게 요한의 세례는 인간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이미 하느님의 심판의 불을 당긴 종말론적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선포한 회개를 세례라는 표지죄의 고백’(6)을 통해 실현시켰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세례에서 성령의 은총의 선물로 깊이 있게 성취될 것이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1).

 

그러나 성령의 풍부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세례는 여전히 심판으로 남아있다(12절 참조). 그러므로 세례는 특히 이 대림시기에 계속적인 회개의 태도처럼 생활화해야 한다. 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전체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변화의 표지이다.

 

2독서: 로마 15,4-9: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성서를 증거로 내세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켰는지를 상기시키면서(로마 15,4-9), 이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그 의미를 되찾고 사랑의 역사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야 하며, 반드시 다시 오셔야 한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 목소리로예수를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러 사람의 몸으로오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게 될 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1요한 4,2-3 참조).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것이 좋겠다.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또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매 순간의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언제든지 열어드릴 준비되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자.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