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없는 나는?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코 1,21ㄴ-28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되는 양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EBS 화해 프로젝트에서 방영되었던 ‘해병 망치부대 동기, 잊지 못할 구타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해병 망치부대란 80년대 초 북한의 간첩침투사건이후 보복을 하기 위해 북파공작원을 기르던 부대라고 합니다. 훈련은 쓰러질 때까지 지속됐고 사람을 인간병기로 만들기 위해 구타와 가혹행위가 반복됐다고 합니다.
망치부대에서 같이 근무한 두 해병대 동기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동기로 들어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강대중씨가 하사관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반대로 동기였던 노영길씨를 많이도 구타했습니다.
노영길씨가 그것 때문에 상처가 많았는데, 그 이후 상황은 역전됩니다. 두 사람은 같이 망치부대로 차출되어 이번엔 노영길씨가 훈련조교가 되었고 강대중씨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노영길씨는 그 미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강대중씨에게 더욱 지독하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사관이었던 강대중씨는 무릎이 안 좋아져서 강제 제대를 하게 됩니다. 강대중씨는 무엇을 하든 1등이었고 직업군인을 하려 했던 터라 자신이 평생 살 곳이라고 여겼던 군대를 떠나고서는 자살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산 속에서 2년을 숨어 살다가 그래도 살아보려고 배를 탔는데 그만 무릎이 안 좋아서 그물에 다리가 걸려 한쪽 다리를 잃게 됩니다. 그렇게 군대 동기에 대한 원망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영길씨도 트라우마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 아내가 툭 치기만 해도 강대중씨에게 맞았던 기억 때문인지 아내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둘은 함께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친구 때문에 한 다리를 못 쓰게 되었지만 그래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나고, 함께 등산을 하며 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해진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노영길씨가 인도네시아의 다른 무술을 하는 사람과 대련할 때 같은 해병대로써 강대중씨가 응원을 해 줌으로써 서로 진심으로 30년간의 증오를 털어내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털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강대중씨는 30년간을 미움 속에서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대중씨가 원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는 노영길씨의 마음이었습니다. 노영길씨도 사실 강대중씨가 그렇게 된 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니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이 더 많이 일어나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이 아니라 바로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내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마음입니다. 내가 더 해 주었고, 내가 더 많이 피해를 당했고, 내가 더 참아내야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절대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를 어떤 큰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인 이유는 당신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에게서 자존심이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까지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줍니다. 자존심이 마음에 지옥을 만든다면 겸손함은 마음에 천국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 이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우리 또한 천사들보다도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영원히 질투할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겸손함을 보시고 친히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덕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처럼 “제가 무엇이기에 저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만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서 자신에게 수백만 원 꾼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겼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처지를 먼저 알아야합니다. 무상으로 천사들보다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없었다면 지옥으로 가야했을 우리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지옥에 갈 운명이었습니다. 이 우리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 덕인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지렁이보다도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2015)
- 전삼용 신부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