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돌아올 수 없는 한계|………◎

수성구 2018. 1. 22. 09:43

돌아올 수 없는 한계|………◎ 전삼용♡신부

 


돌아올 수 없는 한계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르코 3,22-30

세계3대 테너로 알려진 사람들은 플래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와 루치아노 파바로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 도밍고와 카레라스는 단순한 경쟁자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 앙숙관계로 알려져 왔습니다.

1984년 당시 스페인 까탈로니아 지역은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 지역으로 부터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한창 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출신의 카레라스 역시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순회공연을 하면서 서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공연을 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레라스는 도밍고 보다 더 큰 적을 만나고 맙니다. 그가 백혈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레라스는 매달 골수이식과 수혈 등을 했습니다. 고통스런 치료를 위해 미국방문을 해야만 했습니다. 막대한 치료비로 인해 재정적으로 곤란해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력에 한계에 다다른 그 때 그는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Hermosa 라는 재단의 도움으로 카레라스는 치료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Hermosa재단에 가입 하려던 카레라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 준 재단의 설립자이자 후원자가 도밍고이며 애초에 그 재단을 설립한 목적이 카레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도밍고는 도움을 받는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익명으로 재단을 운영 해왔던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크게 감동하여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도밍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라스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 날 이후 그들은 서로를 진정한 경쟁자로 존중하며 멋진 공연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후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세 테너가 처음으로 합동 무대에 선 것은 1990년 7월 이탈리아 월드컵 전야제에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 카라칼라가 지은 노천탕 자리에서 열린 이 공연을 먼저 제의한 것은 호세 카레라스였습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카레라스의 백혈병 완케를 축하하는 뜻으로 함께 동참하여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호세 카레라스를 위해 Hermosa를 세우고 자신을 그 뒤에 숨긴 것은 호세 카레라스가 돈이 없어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도움을 주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돌아올 수 없는 한계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존심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청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같이 죄를 짓고 같이 어둔 밤을 지세지만 가리옷 유다는 용서를 청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고 베드로는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기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사탄을 쫓아내는 힘이 바로 악령이나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능력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능력이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죄는 다 용서 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죄, 그것은 성령께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그 힘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네 명이 들고 온 중풍병자를 보며 ‘네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자,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힘과 병을 치유하는 힘은 같은 성령에게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교회에 하늘나라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하늘나라 열쇠란 이 세상에서 맺고 푸는 권한인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성령이 곧 하늘나라 열쇠이고 죄를 맺고 푸는 권한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악령이 들린 병을 치유해 주시는데 그것이 성령이 아닌 사탄의 힘으로 한다고 말해놓고, 마지막에는 같으신 성령 앞에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는 양심이 존재하는 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당신을 악령이라고 불러왔던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신 동시에 정의이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구아수 폭포에 ‘악마의 목구멍’이란 지역이 있습니다. 강은 그 폭포 이전까지는 그 앞에 그런 무서운 폭포가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꿀 정도로 평온하게 흐릅니다. 그리고 갑자기 폭포가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는 곤충들도 가까이 갔다가는 다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일단 들어서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곳, 그 한계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어쩌면 상대가 용서해 줄 수 있어도 나의 자존심이 용서를 청할 수 없는 한계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적당히 교만해 졌다고 생각하면 그때그때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느님이나 성령님께 대한 모독의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 돌아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런 상황일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지 뻔히 알면서도 유다와 같이 용서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져서 절대 용서를 빌지 않는 수준, 우리는 그런 극단이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며 작은 잘못이 있을 때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바로바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 한계는 흐르고 흐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로 지나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2014)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