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수성구 2018. 1. 4. 04:17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전삼용♡신부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복음: 요한 1,35-42

1996년 2월 4일, 저는 중고등부 교사 피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거의 1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면서도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저였습니다. 그날 저녁 강당에서 불을 끄고 묵상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불 꺼진 강당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분명 불을 껐는데도 형광등의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경험 있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형광등이 꺼진 것 같아도 약간의 전기가 흘러서 조금씩은 빛을 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던 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그날 무언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실 형광등에 조금씩 전기가 흘러 빛을 내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지난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저이지만 저의 성소를 결정한 대략적인 시간과 날짜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 이후로 저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더니 성소에 대해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갈등이 그 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가 되기로 그날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결단이 의지가 되었고, 이 의지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단과 의지가 부족했던 친구들은 어려움이 닥치자 매우 휘청거렸고,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과 안드레아가 그리스도를 만난 시간이 ‘오후 4시쯤’이었다고 합니다. 왜 요한은 그 시간을 기록했을까요? 그만큼 그 시간 이후로 새로운 만남과 변화를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그 전에는 ‘랍삐’, 즉 ‘선생님’이라고 여겼지만 그 이후로 그분과 함께 머물면서는 그분을 ‘메시아’로 믿게 됩니다. 새로운 관계, 그것도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와의 만남을 가졌던 그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태어난 날과 시간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낮 12시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저를 낳고 어머니가 정오를 알리는 시계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시간, 어머니는 그 시간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 이후로 새로운 생명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들이 바로 이런 시간들입니다.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남편이 있다면 아내는 그 남편에게 어떤 마음이 들까요? 서운하지 않을까요? 그만큼 자신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만남은 ‘계약’입니다. 가끔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하게 되는데,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처럼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오다가 간단하게나마 혼인예식을 하면 매우 감격해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서로의 결심을 확인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며 살면 되지, 이런 결단의 순간이나 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계약을 맺었다면 그 계약의 조건을 끝까지 이행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관계도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의지는 결단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결단의 순간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은 관계를 끝까지 유지해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칼을 갈고 장작을 장만하여 아들을 바치러 떠납니다. 조금도 주저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하란 땅에서부터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고 당장 떠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 마음이 흔들려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도 결단에 따른 것이고 그 결단이 있었기에 다른 어려움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완전하지 못했다면 그 믿음의 시험대에서 수없이 넘어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결단의 순간이 없다면 결혼해서 살다가도, 사제가 되어 살다가도, 종신서원을 했더라도 어려움이 닥치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은 믿음도 없고 관계도 오래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있는 것’입니다. 또 그 의지는 결단을 하게 만드는데, 그 순간은 절대로 잊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실 때 도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오후 4시부터 그리스도와 머물기로,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하다가 마는 사람은 의지도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과는 오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 번 하면 끝장을 봅니다. 결국 관계가 오래갈 수 있는 사람이란 이런 결단력과 의지가 강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례 받을 때도, 견진 받을 때도, 첫 영성체 할 때도 그런 존재적인 결단을 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분을 목숨을 걸고라도 사랑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시간을 꼭 가져봅시다. 그래야 모든 역경에 휘둘리지 않고 굳건히 끝까지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삼왕은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 나섭니다. 한 번 발을 떼고 걷기 시작했다면, 만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결단이 믿음이고 사랑이고 의지이고 만남이고 구원인 것입니다.(2013)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