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라 생각되면 중독 된 것|………◎ 전삼용♡신부
내 것이라 생각되면 중독 된 것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복음: 루카 2,36-40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나나’는 1879년부터 다음해까지 90회에 걸쳐 일간지 <보르테츠>에 연재되었다가 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나나’는 극장의 여배우로 활약하다가 스스로 창녀로 전락해버리는 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풍만한 육체와 아름다운 미모로 연극배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탁부인 어머니와 기와장이였던 아버지와 살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가난한 시절에 가져보지 못했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갖게 됩니다. 파리의 시궁창에서 독을 묻혀 나르는 독파리 나나의 성적 매력을 가진 육체덩어리에 은행가, 백작, 신문기자, 청년 장교, 갓 중학교를 졸업한 소년 등 숱한 사내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바쳐 나나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쾌락의 포로가 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파멸되어 버립니다. 쾌락을 찾아 상한음식에 파리 떼가 꼬이듯 그녀 주위로 몰려든 사내들은 뼛속까지 빨아 먹힙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음탕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즐기던 나나 역시 왕궁처럼 화려한 거실에서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나나의 마지막 모습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비너스는 썩고 있었습니다. 마치 시궁창이나 길거리에 내버려진 상한 고깃덩이처럼 썩고 있었습니다.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해친 독소가 마침내 스스로의 얼굴을 천연두로 썩게 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한태완 목사 설교자료집, 중독]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 것’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사람, 내 집, 내 차, 내 명예, 내 돈, 내 학식 등의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하면 곧 그것의 ‘노예’가 됨을 알지는 못합니다. 노예란 주인의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게 되고 얻으면 기쁘게 되고 사라지면 슬퍼지게 됩니다. 그러니 내 것의 노예인 것입니다. 나나 또한 자신이 가진 육체적 관능미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졌다고 믿었던 쾌락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는 평가의 노예가 된 처지를 아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하느님께 속했나, 사람에 속했나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내가 몰두하는 것을 보면 안다. 약간의 비판에 분노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거절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칭찬에 내 기분이 고양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성공이 나를 흥분케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대양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이 철저히 물결치는 대로 요동치는 인생이다.”
이 세상 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멀리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어떤 마약 중독자가 너무나 마약에 끌려 다니는 것이 싫어서 전화기를 꺼 놨는데, 딸이 학교에서 아빠에게 전화가 안 되니 밤늦도록 울면서 기다려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약을 완전히 끊지 않는 이상 가족과 가까워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에 집착해 해 있으면 하나는 멀리하게 마련입니다. 세상을 좋아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카인은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 것이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없기에 그것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감사의 예물을 충분히 봉헌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아벨은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까지도 가차 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그래서 세상 것의 집착이 아닌 세상 것을 모두 봉헌함으로써 증명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기에 그것을 얻어도 또 그것을 잃어도 충격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저는 손가락 두 개가 잘렸는데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진 것을 전부 빼앗아 가시더라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욥의 모범이 나옵니다. 세상 것에 초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 자유인인 것입니다.
어느 알콜 중독자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은 행복하게 살았지만, 동생은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두 사람에게 각각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형과 아우가 똑같이 답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탓할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섬길 것인가는 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 것과 비교당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남들이 우리를 개와 같다고 말한다면 누가 기분 좋겠습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 것들과 비교당해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을 아까워할 수 있겠습니까?(2014)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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