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만세! 내 팔을 잘랐다!”|………◎

수성구 2017. 12. 25. 05:28

“만세! 내 팔을 잘랐다!”|………◎ 전삼용♡신부

           



“만세! 내 팔을 잘랐다!”


2017년 나해 성탄 대축일
복음: 마태오 1,1-25

로마에서 공부할 때 저의 지도신부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신학생 때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당신이 신학생 때는 느닷없이 신학교 안에 있었던 주교관에 찾아가곤 했다는 것입니다. 왜 찾아왔냐는 주교님의 질문에 그냥 TV나 같이 보기 위해 왔다고 하며 둬 시간 동안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주교님과 함께 TV를 보다가 돌아오곤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그분이 가난하게 살며 가난한 분들과 사제관에서 함께 사시는 모습보다 더 존경스러워보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교님이 부르시면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또 만나더라도 빨리 혼자 있기 위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만 할 것입니다. 이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를 만나는 신자분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기껏 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하고서는 제 멀리부터 앉습니다. 부담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에 타라고 해 놓고 잠을 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라도 계속 해야 할 것 같고 저를 즐겁게 해 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고 또 혹시나 말을 잘못하여 책이라도 잡히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오늘 성탄을 맞아 구유위에 누워계신 예수님은 참 사랑이 행위가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잘 깨우쳐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머무시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려하지 않습니다. 숨만 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때 이 세상 모든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던 분이 바로 아기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분이라 그 안에 사랑이 가득하셨습니다. 사랑은 마치 태양의 따듯함처럼 그분 안에서 온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자체이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께 무언가를 해 드리려 할 때 예수님은 당신 곁에서 숨만 쉬고 있는 마리아를 가리키며 마리아가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사랑하면서도 예수님과 머무는 것이 힘들었지만 마리아는 숨만 쉬고 그분 얼굴만 보고 있으니 영원 동안이라도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누군가와 오래 머물기 위해서는 그 머무는 동안에 상대를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지치게 만드니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관계 때문에 힘들기도 한 것입니다. 그저 머물기 위해 자신의 힘을 빼면 그만입니다. 살아만 있으면 됩니다. 누구와 머물기 위해 이미 자신은 자신을 떠나고 자신을 버려야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하늘을 포기하고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냥 숨만 쉬는 아기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숨만 쉬고 계십니다. 누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이 당신의 사랑을 느끼고 찾아오면 그냥 작은 미소로 그들을 맞아줍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을 만나는 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당신이 사랑이 되신 이유는 이처럼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담을 좋은 그릇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신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담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담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그 자아를 버려야 사랑으로 가득차고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무언가를 해 주기 위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은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태양처럼 자신을 좋아하는 이들은 올 것이고 어둠을 좋아하는 이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기필코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떠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함께 머무는 것 자체가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 계속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으로 남습니다. 그저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을 떠나 왔다면 그것으로 할 것은 다 한 것입니다.

영화 ‘127시간’은 보라고 만들어놓고 보는 동안엔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과 함께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만세! 내 팔을 잘랐다! ... 이젠 살았어!”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으로 가벼운 하이킹 등반을 떠났던 자신만만한 청년 애론 랄스턴은 그만 호박돌을 잘못 짚었다가 돌과 함께 떨어져 절벽 사이에 손이 끼이게 됩니다. 그는 음식과 물 없이 5일을 버팁니다. 가진 칼로 자신 팔을 짓누르고 있는 돌을 긁어보지만 칼만 무뎌질 뿐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지만 남은 방법은 자신의 손을 그 뭉툭하게 된 작은 칼로 잘라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뼈 때문에 팔목이 잘려지지 않을 것이기에 먼저 자신의 팔꿈치를 거꾸로 꺾어서 부러뜨려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기절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서 멈추어야 할까요? 그는 먼저 팔을 부러뜨립니다. 칼로 살과 힘줄을 자릅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실제로 팔을 자르는 데 성공한 후 기쁨의 함성을 질렀었죠. 장말 ‘와우’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내 팔을 스스로 잘랐다는 것보다 이제 살았다는 사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던 시간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죠. 맨 처음 조난됐을 순간부터 달리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생각을 했지만 평소에 쓰던 스위스 군용 칼 대신 싸구려 중국제 칼을 가져왔던 터라 결단이 힘들었던 것이요.”

그는 살아야겠다는 결단을 한 순간 단 5분 만에 팔뼈를 부러뜨렸고 팔을 자르는 데는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마셔야만 했던 그 고통의 잔을 마시고는 환희에 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고는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머니께서 제 손을 너무 꽉 쥐셔서 제 남은 한 손까지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마음을 졸이시는 것을 보고 있을라니 저도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절 와락 끌어안고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데 정말 코끝이 시큰해지고 뭉클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을 보며 우리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분은 당신 팔보다도 더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하느님과의 단절을 감수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쌔근쌔근 잠자고 계시지만 그 눈에는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끊는 고통을 겪은 후의 승리의 눈물이 함께 녹아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행복한 미사. 이것을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 생명까지 스스로 끊어버리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 만세, 내 팔을 잘랐다고 외치시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 하면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마누엘, 메리 크리스마스!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