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사랑과 기대|………◎

수성구 2017. 12. 23. 04:03

사랑과 기대|………◎ 전삼용♡신부

       



사랑과 기대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57-66

‘연탄길 2’에 ‘오랜 기다림’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중국 허난성 루오양 시 교외의 구어판조 씨와 마음씨 착한 그의 아내 주원샤 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농부인 구어팡조 씨는 우물에서 일을 하다가 깊이가 18미터나 되는 우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를 다친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습니다.

결혼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또 뱃속에 아기를 잉태한 그의 아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남편의 몸을 매일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마사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원샤 씨가 방에 들어갔을 때 놀랍게도 남편이 두 눈을 뜨고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의사조차 이 사실을 인정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의식이 돌아온 구어팡조 씨는 오래 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아내와 함께 불렀고 의사가 물어보는 간단한 산수문제도 풀었습니다.

그런데 구어팡조 씨가 얼마 만에 깨어났는지 아십니까? 23년 만에 깨어난 것입니다. 20대의 푸르른 시절에 잠이 든 구어팡조 씨는 50살이 돼서야 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아내 주원샤 씨의 곱던 얼굴에도 세월이 나무 등걸처럼 주름져 있었습니다.

사랑의 두 날개는 믿음과 희망이라고 합니다. 주원샤 씨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식물인간으로 깨어날 기약이 없는 남편 앞에서 23년간이나 매일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희망)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대하지 않지 않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이미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정한 듯이 보입니다. 그의 이름 또한 요한이라고 정하셨고 메시아의 길을 닦는 예언자로 정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 즈카리야도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며 자신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미 정해진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즈카리야가 거부해 벙어리가 된 것처럼, 또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그 뜻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피땀을 흘리며 그 뜻을 철회해 줄 것을 기도한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있지만 그 기대가 이미 강요된 ‘운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시밭길의 힘겨운 삶을 기대하신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야하지 않을까요? 사실 살아가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향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매 순간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축복입니다.

얼마 전에 급하게 어떤 분이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상담해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에 성당을 열심히 다니던 어떤 분이 무언지 모를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가 봐도 명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아 결국 비싼 돈을 지불하고 굿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조금 좋아지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니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굿을 하지 않으면 올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저에게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굿을 하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라고 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결국 그것은 본인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해야 옳은지 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며 올해 죽더라도 굿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에게 바라는 뜻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면서 자녀가 안 좋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은 분명히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을 위한 가장 영광스러운 길을 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 또한 항상 좋은 결과를 낼 것을 믿어야합니다.

오늘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길은 잘 알았지만 교구청으로 이사 온 후 처음 내려가는 것이라 자주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길이 막히고 많은 신호등을 거쳐야 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는 ‘왜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나?’하며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네비게이션이 길만 가르쳐 주었던 것이 아니라 고민을 덜어주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르쳐주는 길로만 가면 다른 갈등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는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대를 따르는 것이 속편하고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매번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좋은 기대를 하십니다. 자녀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니 내가 잘되기만을 바란다는 것을 믿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기 위한 기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2013)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