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자화상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복음:마태 2,13-18
프리다 칼로의 그림 ‘작음 사슴’을 보며 치유의 감정을 느꼈던 송정림씨는 그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나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파서라기보다 겁이 나서 울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상처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눈이 보이는 상처에는 덤덤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에 더 많이 울게 돼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상처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틈에서 아파하던 어느 날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 작은 사슴 한 마리가 몇 개의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마치 내 몸에 화살을 맞은 듯 아릿한 고통이 스며들었습니다. 그 사슴은 바로 그 그림을 그린 프리다 칼로 자신이었습니다.
주로 자화상을 그려 온 프리다 칼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여기서 잠깐 프라다 칼로의 삶을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프리다가 열여덟 살 때 학교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탔던 버스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습니다. 산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끝없는 수술과 수술... 악목 같은 치료 끝에 프리다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생긴 고통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습니다.
1929년 스물둘의 프리다는 스물한 살 연상인 디에고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당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디에고의 아내로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성 편력이 심한 디에고는 결혼한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의 유산 끝에 만신창이가 된 프리다. 결국은 남편과 여동생에게 동시에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 인생에 대형 사고가 두 번 있었어. 하나는 교통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을 만난 거야. 그중에 당신을 만난 게 더 나빴어!”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아픔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아픔을 토해내며 결코 열정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송정림씨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어느 슬픈 날 노트에 내 얼굴을 그려 봤는데 나도 모르게 뺨에 눈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그리는 것이더군요. 아니, 자신의 마음이 저절로 담겨지는 것이 자화상임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는 사슴.... 그런 자화상을 그릴 때 프리다 칼로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던 걸까요. 얼마나 상처를 입었으면 그런 자화상을 그렸을까요. 그녀의 자화상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내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낼 때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그 아기들이 하느님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다고 순교자들로 여기는가?’하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묵상하다보니, ‘그렇다고 우리는 구원받기에 합당하게 한 일이 뭐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또한 우리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된 것이기에 우리 또한 우리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피’는 헤로데의 증오에 의해 흘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피흘림이 있었기에 헤로데가 예수님을 끝까지 찾지 않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흘린 피가 된 것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을 당하였다면 그 사람에게 애정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정의이신 분이기에 죄 없이 피를 흘렸다면 죽음 뒤에 합당하게 그것을 갚아주셔야 당연합니다.
구원은 그분에 의해 오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희생들, 그것이 잊혀지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그 희생은 자의든 타의든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섭리로 구원에 이르고 영광에 이르는 우리의 자화상들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랑할 것도 없고 구원을 우리 힘으로 얻었다고 교만을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에게 느끼는 그대로,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게 찬미 받으셔야 하는 날이 오늘인 것입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주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 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도 그 영광을 나누어 주십사 기도합시다. (2013)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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