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수성구 2017. 12. 21. 03:53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전삼용♡신부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39-45

<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순교복자 수녀회의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의 강의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기억의 치유’라는 주제로 한 강연 중에서 ‘태중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평생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주셨습니다.

한 번은 수녀님이 종신서원자 피정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한 평범한 수녀님이 갑자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수녀님과 상담을 하다가 그 수녀님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동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자신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흰 가루 같은 것들이 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루가 몸에 닿을 때는 매우 따가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 꿈이 무언지 모르고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가졌을 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의 대답입니다.

“네 오빠를 낳고 몸이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복용했단다. 그런데 네가 들어서 있었단다. 엄마는 바로 아이가 또 들어설 줄은 몰랐단다.”

사실 이 수녀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무엇이 닿기만 해도 매우 통증을 느껴서 샤워를 할 때도 때수건으로 문지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꿈속에서 본 동굴은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그 아이는 자신이었으며 그 하얀 가루는 바로 진통제였던 것입니다. 그 진통제가 피부를 약하게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아주 작은 것, 이것은 골수까지 박혀서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죄가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동료 수녀님 중 한 수녀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수녀님이 어머니와 대화를 할 때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얘, 내가 너를 가졌을 때 네가 남잔 줄 알았단다. 그래서 배내옷도 다 남자 것으로 준비했었지. 그런데 네가 나왔을 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니?”

이 때 그 수녀님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합니다.

“그 때 ‘네’가 할아버지보다 더 실망했잖아!” 어머니에게 ‘너’라고 자신도 모르게 불러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가족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고 남자처럼 행동하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상처들이 한 번에 폭발해 버렸던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지만 이런 작은 말 한 마디도 아이들에게는 평생 응어리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인데, 하느님께서는 왜 빵나무를 만들어주지 않으셨을까?’

탈무드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빵나무를 만들어 주시지 않은 이유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완성품을 주시지 않으시고 재료를 주십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협조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창조하는데 협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태중상처나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낳는 과정에서 부모의, 특히 어머니의 아주 작은 것도 자녀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심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았다고 말합니다. 그 기뻐 뛰놀게 된 이유는 주님의 어머니의 인사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인사말을 듣는 것은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에게 좋은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그 태중의 아기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서 ‘태중의 아기’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태중의 열매(karpos)’입니다. 태중의 열매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나무에 따라 열매가 결정됩니다. 사과나무에서 도토리가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 태중의 아기가 성모님의 인사말 때문에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말이 엘리사벳을 빼고 아이가 혼자 듣고 뛰놀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어머니를 통해 열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먼저 성령으로 차야 그것이 아기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나무고 아기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정체성은 그 열매인 태중의 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맺은 열매는 하느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그 열매를 맺은 성모님도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분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흠도 티도 없는 세상의 모든 죄의 보속을 위한 희생제물이시라면 그 열매를 맺은 어머니도 흠도 티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복되시기에 아기도 복된 것이고, 어머니가 깨끗하기에 그 열매도 깨끗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열매 맺어지기에 합당한 흠도 티도 없는 나무는 성모님 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됩니다. 신자들을 보면 사제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행복하면 사제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제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나 성체가 그렇게 전달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맺는 열매를 제쳐놓고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저주받아 말라버린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은 나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들이 행복해지게 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법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병든 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열매가 나무에 달려있듯이, 또 열매로 나무를 (2012)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