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친밀함을 만드는 능력의 비밀|………◎ 전삼용♡신부
관계의 친밀함을 만드는 능력의 비밀
2017년 나해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 복음: 루카 2,22-40
1. 부모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2. 부모의 가장 큰 지혜는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의 자녀들을 최고로만 키우려고 했다가 자녀들의 반격에 크게 상처를 입고 깨달아 ‘엄마 반성문’이란 책을 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이유남 씨가 내린 결론입니다.
자신이 자녀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식이 자신을 위한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했던 이 어머니는 자녀를 위한 것이라면 목숨까지 바칠 정도였습니다. 자녀를 위한다면 명목으로 이분이 자녀에게 원했던 것은 항상 1등을 해야만 하는 성적과 많은 상을 받아야만 했고 또 학교에서 높은 위치의 임원을 맡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남자아이는 엄마의 이 요구에 잘 따라주어 전교 1등과 많은 상과 학생회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고 하면 목소리에 힘을 빼라고 하며 지난 성적표와 비교해서 수학은 왜 떨어졌느냐고 야단쳤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 딸은 영 공부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치부 때부터 잠도 재우지 않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학교에서 받은 첫 시험성적은 60점. 엄마는 그런 점수를 맞고도 잠이 오느냐며 다그쳤고 오빠처럼 100점을 맞으면 한 과목 그렇게 맞은 것 가지고 법석을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 마음 안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복수심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줄 수 있는 때가 바로 고 3. 전교 1등을 하던 첫째는 고 3 때 돌연 자퇴 선언을 합니다. 집은 전쟁터가 됩니다. 아이는 컴퓨터 게임에 파묻혀 폐인이 되어갑니다. 부모의 심장은 썩어갑니다. 둘째 아이도 그렇게 공부 잘 하는 오빠도 자퇴하는데 자신은 왜 못하느냐며 아빠 도장을 훔쳐 자신도 자퇴를 하고 둘이 방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이유남 씨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느냐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빨리 불을 끄라고 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신이 하지 못한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것이 좋은 엄마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이 극단적인 엄마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우리는 관계를 통해 인생이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리란 걸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관계 맺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관계는 내가 상대의 심장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지 상대를 내 심장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감정으로 가는 것이지 상대를 내 감정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떠나 상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영화 127시간에서 아들은 어머니에게 가기 위해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지 자신의 팔을 끼워놓은 채 와 주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이 오랜 세월 함께 살아도 항상 남남처럼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가지 않거나 상대가 오지 않아서입니다. 서로의 심장을 향해 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떠날 때 관계는 깊어지고 이 일이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일어날 때 둘은 하나가 되게 됩니다.
엄마가 아이와 다시 관계가 좋아지기 위해서는 이전의 자신을 끊어야만 합니다. 자신으로부터 떠나야만 합니다. 과거의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잊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아이를 억지로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내가 아이를 찾아 나서야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자유를 속박하며 자신 안으로 끌어들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판단’입니다. 상대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면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상대를 심판합니다. 나에게 맞춰지지 않는 상대가 원망스럽습니다. 나는 TV 드라마를 보며 눈물이 나는데 남편은 왜 무감각하느냐고 따집니다. 남편은 스포츠 중계를 함께 보지 못하는 아내와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상대를 판단할 것이 하나도 없음이 보입니다.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상대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상대도 놓지 못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가 아니라 자아 탓입니다. 상대 탓하는 것과 그 상대 안에 있는 뱀을 탓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둘은 하나가 아닙니다. 상대 마음 안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은 이 둘을 분리해서 봅니다. 127시간에서 만약 자신에게 오지 못하는 아들을 엄마가 찾아갔다면 엄마는 돌에 팔이 끼여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대에게 가까이가면 이해하게 되지 판단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이 팔에 끼인 것을 ‘너의 탓’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를 탓하고 자신의 자리에만 있었던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을까요? 우리의 심판관이시니 심판관답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을까요?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 잡혔습니다. 그 여자를 보며 나무랐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자와 돌을 든 바리사이들 중간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은 바리사이들 탓이라고 땅에 적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아를 죽이는데 당신 피가 필요함에도 아직 십자가를 지지 못한 당신 탓이라고 적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보고는 당신이 잘못을 물을 마음이 없다고 하시며 당신에게 돌아올 것을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깊은 관계를 맺는 이의 특징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판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관계를 방해하는 원인인 자아임을 밝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아를 떠나서 누군가를 향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자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 뱀으로부터 지배 받은 이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그 뱀을 사랑의 피로 죽여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합니다. 그리고 그를 당신께 끌어들이기 위해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기다리십니다. 그의 자아를 죽일 피를 흘릴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서 배우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렸을 때 성모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인식을 치른 다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오는 것이 일상적인데 요셉 성인은 그것을 깜빡하시고 아들을 챙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난 뒤 만났을 때는 서로 상대와 함께 있어야 할 아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분은 서로를 원망하지 않으십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을 찾아도 그렇게 하신 이유만을 물을 뿐이지 야단치지도 않으십니다. 서로 자신들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들이 모인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성당만 나온다고 성가정이 아니라 서로 상대의 부족함을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모인 가정인 성가정인 것입니다. 요셉 성인도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돌아오셨을 때 아기를 임신한 것을 알고 모두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쓰시기 위해 파혼을 결심합니다. 아기를 임신시켜 놓고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 마음 깊숙이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동시에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사실 남을 판단하며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상대에게 유익이 된다고 믿고 끊임없이 그렇게 판단을 하며 상대를 자기 틀 안에 가둡니다. 판단은 그물로 상대를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라에서만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나라를 빼앗는 행위와 같습니다. 사랑은 나의 나라를 떠나 상대의 나라에 들어가 살려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잊고 상대의 감정에 함께 기뻐하고 눈물 흘리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방법이란 자신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상대의 심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피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당신께로 오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채 사랑하거나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심장을 향해 가기 위해 자신을 떠나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우며 훈련이 되는 방법은 생각을 끊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끊으면 상대를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생각을 끊는 즉시 내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향하게 됩니다. 생각이 바로 내가 자아를 향하는 내 자신과의 대화이고 내 안에 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면서 어떻게 상대와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스마트폰을 검색하며 대화하자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꺼야 하는 것처럼 생각을 멈추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실질적인 방법은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의식을 숨에 집중하며 시선이 자기 밖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식을 자신 안으로 집중하면 상대가 하는 말이 잘 안 들리지만 무언가 잘 들으려고 하면 생각이 끊기는 이치입니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 상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상대를 향하기 위해 나의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을 하지 않고 살려고 하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겨야합니다. 맡겨야합니다. 그렇게 혼자 있을 때는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생각을 끊습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역시 생각을 끊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부터 연습되어야합니다. 나는 남을 나에게 끌어들이는 사람인지 내가 남에게 다가가는 사람인지 항상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관계의 친밀함은 바로 생각을 끊는 능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과거의 기억을 끊고 나의 이기적인 의지를 끊고 나의 생각을 끊으면 나는 온전히 상대의 것이 되어 그 사람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고 우리가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그렇게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치의 행복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참 행복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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