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수성구 2017. 11. 15. 06:48

2017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지혜 6,1-11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복음 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리우드 원조 섹시 스타라고 불리던 샤론 스톤(Sharon Stone)을 아마도 웬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지요. 다행히 응급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말을 더듬게 되었고 다리를 절며 시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연기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갔습니다. 물론 일상 삶 역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도 샤론 스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의 제 모습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저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쓰고 싶습니다.”

처음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 절망하고 아파합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선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런데 샤론 스톤은 그러한 고통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것을, 그래서 처음 겪게 되는 이 새로운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이제 더 이상 배우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극복해서 다시 TV 드라마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그 순간에 절망하고 아파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분명히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딱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왜 깨끗해진 나머지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를 고민해 봅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다시 나병의 상태로 돌아갈 것 같아서 계속 괜찮은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치유되었다는 기쁨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또 치유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 않아서 자신 역시 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병 걸렸을 때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나병 걸렸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기 싫어서 심지어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주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병 걸렸을 때와 치유되었을 때의 모습 모두를 인정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한 긍정적이고 희망을 간직한 사람만이 믿음을 갖게 되고 이 믿음이 자신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에리히 캐스트너).


하루 묵은 전주의 한옥집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좋은 글’ 중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세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잃은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재물이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든...​

모든 사고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잃은 것만 세는 어리석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얻은 것을 셀 수 있는 지혜로운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


신성리 갈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