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수성구 2017. 11. 9. 07:43

2017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 에제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복음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한때 남들보다 신제품을 빨리 구입해서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비자 군을 일컫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소리를 들었던 저였습니다. 특히 컴퓨터, 카메라, 스마트폰 등에 관심이 컸고 또 이를 누구보다도 먼저 사용해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앞서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새 것을 구입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그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새로운 기능을 익히고 능숙하게 사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비되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지금 익숙한 것을 더 잘 활용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지요. 새 것이 좋아 보이지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특별한 기능이 많은 것이 좋아 보이고 필요할 것 같지만, 익숙한 기능을 더욱 더 잘 활용한다면 효과가 더 크게 될 것입니다.

문득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새 영세자로부터 세례를 받았음에도 뭐 특별한 것이 없다는 불평 비슷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새 영세자만이 하는 말이 아니라, 많은 신앙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갈등이기도 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특별한 일, 그리고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들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 끊임없이 특별하고 새로운 표징을 청했던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얻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면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의 삶 안에서 주님을 느끼고 주님과 함께 할 때 큰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면서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청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특별하고 새로운 것만을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어떤 특별함도 또 새로움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삶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요? 늘 특별함과 새로움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 늘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평가되는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을 더 잘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실수할 가능성과 맞서는 것을 말한다(이윤기).


라테라노 대성전 내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어느 시골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입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보고서 말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크고 힘이 세서 무거운 짐을 도맡아 나르고 있지. 그래서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옆에 있던 암소도 말합니다.

“아마 내가 더 사랑을 많이 받을 걸? 내 젖으로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먹지. 먹는 것이 최고지. 그래서 날 가장 사랑한다고.”

이번에는 양이 말합니다.

“다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주인님이 매일 밤 덮고 자는 이불은 모두 내 털로 만든 거라고. 나를 매일 덮고 자는 걸 보면 주인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암탉은 매일 알을 낳기 때문에, 고양이는 비위생적인 쥐를 잡기 때문에 주인이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 집에 함께 살게 된 강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도 주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도무지 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바로 그때 늙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말합니다.

“강아지야. 저 친구들의 말이 다 맞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서 울고 앉아 있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사실 너는 꼬리를 쳐서 주인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단다.”

주인이 일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강아지는 쪼르르 주인 앞으로 달려가서 꼬리를 치면서 맞이했지요. 그러자 주인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너를 보니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구나. 네가 어떤 동물보다도 최고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내가 재주가 많아서?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바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치면서 주인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낙엽이 엄청 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