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 제1독서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언젠가 어느 은행을 갔다가 너무나 친절한 직원을 만났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최고가 아닐까 싶더군요. 그래서 이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지요?”
이 말에 이 직원은 손사래를 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에요. 10년 넘게 한 일인데 이 정도도 하지 못하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사실 10년 넘게 똑같은 일을 해왔다면 이제 지루해하고 지겨워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닐까요? 그래서 “10년 넘게 똑같은 일만 해보세요. 친절할 수가 있겠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나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잘 한 선택이 될까요?
우리는 어떠한 상황도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좀 더 좋은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삐딱한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오히려 힘을 빼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할까요?
얼마 전에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제 앞으로 끼어드는 차를 만났습니다. 저는 이 차가 이렇게 갑자기 들어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접촉사고가 나기 바로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서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저는 사고가 날 뻔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경적을 세게 눌렀습니다. 마침 신호가 정지 신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전사의 얼굴이라도 볼 참으로 바로 옆으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운전사가 내려서 제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까?
‘한 판 하자는 것인가?’
제가 특별히 위협을 가한 것도 없는데, 그저 경적을 조금 세게 눌렀다는 것밖에 없는데 왜 내릴까 싶었습니다. 긴장이 되더군요. 그런데 이 분은 제게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차가 오는 줄 모르고 그냥 들어왔습니다. 놀라셨죠?”
이 운전사 덕분에 기분 좋게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을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과 행동이 전달할 때, 오히려 서로가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부정적이고 미움과 다툼으로 가득 찬 말과 행동은 정반대의 효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는 제자들의 증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면서 먼저 부정하고 봅니다. 이러한 부정이 토마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요? 이런 토마스를 향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는다는 것을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습니다. 긍정적인 마음,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음을 의식치 않으면서 봉사할 수 있는 자는 뛰어난 섬김의 사람이다(블라비스키).
성 토마스 사도. 공평한 세상, 불공평한 세상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억울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보다 착하지 않은데, 또 자신보다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기보다 더 많은 누리고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이런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도맡아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착한 사람이 암이라서 얼마 살지 못합니다. 그 나쁜 사람은 빨리 하느님께서 데리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너무 건강합니다.
이러한 경우 역시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말을 쏠쏠치 않게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억울함은 인간의 관점에서 특히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에는 어떻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으로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은 무엇이든 다 경쟁이고 비교가 따라옵니다. A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B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C는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A, B, C를 친구로 두고 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직장을 다닐 뿐이고, 배우자 없이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억울해. 왜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만약 자기 곁에 A, B, C라는 친구가 없다면 어떨까요? 그러한 비교 자체를 하지 않겠지요.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성공 자체를 인정하고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패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불공평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의 시작입니다. 지난번, 대구 강의갔을 때 방문했던 김광석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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