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수성구 2017. 5. 27. 07:25

2017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 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아마 어렸을 때에 이런 말을 한두 번은 꼭 들으셨을 것입니다.

“네가 포대기에 싸여서 엄마 젖 먹고 있을 때, 나는 앉아서 이유식 먹었다.”

“네가 겨우 걸음마 뗄 때, 나는 뛰어다녔다.”

“너와 나의 밥그릇 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알아?”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말을 듣지 않게 되더군요. 바로 이제 나이 먹는 것이 싫다고 생각될 때에,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때부터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고 자랑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에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었기 때문에,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이 그렇게 싫은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십이 넘으면 아니 어쩌면 삼십대에도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괜히 기분도 좋지 않고 계속해서 거울만 바라보게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지금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이 될 수 없으며, 지금의 불만족이 영원한 불만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늘 만족하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불만족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변호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감을 가지고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다 들어주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누구를 죽여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저 집이 쫄딱 망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든지’는 복된 삶과 구원에 관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 순간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점차 불만족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겨 있는 기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도는 주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분명히 ‘무엇이든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몇몇 사람의 만족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만족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다(아나톨 프랑스).


강의실의 빈의자. 그러나 계속해서 빈의자일까요?


어떠한 사람도 다 중요하다

여러분들은 외향적인 성격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을 좋아합니까? 아무래도 남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명랑하고 개방적인 외향적인 성격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향적인 사람들은 내성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다지 명랑해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성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마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두 스타일이 각각 이 세상에 똑같이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성격이 좋고, 어떤 성격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격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을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면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의 계명 역시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데 시작합니다.


천사를 통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귀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