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수성구 2017. 1. 27. 07:51

2017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히브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복음 마르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평화방송에 종종 얼굴을 비추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특히 성지에 있다 보면 “신부님, 평화방송에서 봤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반갑게 인사하시지요.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연예인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꽤 익숙해졌습니다.

며칠 전, 미사를 끝내고 성당 밖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께서 저를 향해서 사진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평소의 습관대로 그분을 행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표시하고 웃으면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진을 찍으신 뒤에 제게 다가와 “신부님, 사진이 잘 나왔어요.”라면서 스마트폰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 속에는 제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제 옆으로 보이는 성당의 정면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찍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냥 짐작일 따름이었고,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먼저 “저 찍으시는 거예요?”라고만 말했어도, 혼자만의 지레짐작으로 민망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혼자만의 짐작과 혼자만의 착각입니다.

이처럼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입장으로만 짐작하여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과정 안에서 많은 오해와 함께 아픔과 상처도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내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입장을 전혀 바라보지 않으면서 내 입장만으로 주님을 판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솔직히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씨이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수확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또한 겨자씨 역시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 순간만을 바라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내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지레짐작한다면 하느님의 뜻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씨의 비유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자라나고, 조용히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보십시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섣부른 짐작과 판단을 내려놓는다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길에서 넘어져 본 일이 있는가? 우리 발을 거는 것은 커다란 바위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돌부리이다. 넘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작은 돌부리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심의용)


오늘 축일인 안젤라 메리치 성녀.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

예전에 저는 남들 앞에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울렁증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가슴은 두근두근, 다리는 후들후들... 그러다보니 입은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말이 나올 수가 없었지요. 이러한 제 자신을 스스로 걱정하고 있는데 어느 날 책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성을 보고 두근두근, 시험을 볼 때 두근두근,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두근두근. 이 세상 모든 두근거림은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 말에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근거림이 생겼을 때에는 제게 어떤 기회가 다가오는 순간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뒤로 두근거림의 순간이 오면, ‘내가 좋은 기회가 온 거야. 이 기회를 나는 즐길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울렁증이 없어진 지금의 저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울렁증이 있는 사람만이 두근거림을 체험할까요? 아닙니다. 뜻밖의 일을 경험할 때,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등 역시 두근거림을 갖게 됩니다. 그 순간에 피하려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좋은 기회가 왔음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모습을 갖춘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서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밥배, 빵배, 커피배... 따로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