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성구 2017. 1. 24. 07:01

2017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히브 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마르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초등학생 때 문제아라고 불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못했고, 장난도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산만한 모습에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이 친구는 수업시간에 떠들고 장난을 쳐서 선생님에게 혼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친구를 향해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우리들도 선생님한테 자주 혼나는 이 친구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무시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때처럼 사람들에게 한심하다는 평을 들으면서 살고 있을까요? 이 친구는 지금 연극배우로 또 연출가로 그리고 종종 영화에서도 성격파 배우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있으며, 자신의 일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초등학생 시절에 예상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재 어쩌면 자신의 일을 가장 기쁘게 하면서 살아가는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미래의 일을 예상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지금의 모습으로 미리 판단하고 단정을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성모님과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서운한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냐고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혈연관계를 끊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안에서의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미래, 즉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그 밝은 미래를 위해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과거의 모습, 과거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지나간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미래,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 기쁨의 미래를 위해 지금이라는 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삶을 채운다. 그제야 우리 마음속에서 무언가 춤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이다(마리아 노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모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한 어머니가 어느 날 상점에서 외투 한 벌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 커다란 보석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보석이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산 옷 주머니에 들어있었잖아.’

‘그래도 내 것이 아닌데 빨리 돌려주는 게 맞겠지?’

이러한 정반대의 두 생각이 마음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현자는 이렇게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상점에 가서 돌려줄 때는 꼭 자녀를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하면 보석 내놓는 것은 아쉬울지 몰라도 그보다 몇 배 귀중한 것을 당신의 자녀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자녀가 거짓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그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은 거짓으로 둘러싼 삶을 살고 있다면, 정직하라고 아무리 말한다 해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그 모든 모습은 우리들이 따라서 행하라는 좋은 모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모범, 사랑의 삶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 모범의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모범은 나와 상관없다면서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따라 좋은 모범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어제도 맛있는 것 먹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