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성구 2017. 1. 21. 06:58

2017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히브 9,2-3.11-14

형제 여러분,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마르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십니까?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함께 했던 가족이 많이 생각납니다.

집에서 짐을 싸들고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갈 때,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리고 군대에 갈 때를 떠올리면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을 떠나서 혼자서 생활할 때 어려운 일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병으로 혼자서 끙끙 아파하고 있을 때, 개인적인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를 느끼게 되던 지요.

그런데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 아픈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니 “네가 배불렀구나. 누구는 취직도 못해서 그렇게 안달인데, 너는 직장생활하면서 뭐가 어렵다고 그래?”라고 혼을 내면 어떨까요? 성당 안에서 교우들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성당 당장 나가지 마.”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아닐까요? 위로받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힘듦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힘듦을 아예 피해버리라고 명령을 내려버릴 때 과연 위로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커다란 실망과 함께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쁜 일상의 연속 그리고 여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고민들이 쌓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생각나셨을까요? 당연히 첫 번째로 하느님을 떠올리셨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홀로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는 누가 떠올려졌을까요? 바로 가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이겠지요. 이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붙잡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내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주로 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힘이 되는 위로의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힘을 빼게 만드는 절망의 말이었을까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예수님께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을 기쁘게 하는 말일까요? 주님을 힘들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친절한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절대 헛되지 않다(이솝).


성녀 아녜스


행복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부가 함께 식당을 하니 참 좋겠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함께 계시는 것이잖아요.”라고 말을 했죠.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종일 같이 있다 보면 뭐 좋은 점이 보이겠어요. 나쁜 것만 보이고, 못마땅한 점만 보이고. 화낼 상대가 둘밖에 없어서 종종 싸움만 일어나요. 오히려 남편이 아침 일찍 직장에 갔다가 밤이 되어서 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평생 함께 하겠다고 부부가 되었을 텐데 막상 하루 종일 함께 하니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배우자에게 위로와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속하고 간섭한다는 생각 때문에 같이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상대라도 위로와 사랑을 주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함께 하는 제1법칙이 되지 않을까요?

어느 금술 좋은 연세 많으신 부부에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물음에 그 부부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는 게 뭐 별건가? 서로 정을 주며 사는 거지.”

정을 주며 사는 것, 내가 받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원칙인데도 참으로 지키기 힘들지요?


갑곶성지에도 눈이 많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