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수성구 2017. 1. 20. 05:55

2017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히브 8,6-13

형제 여러분, 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복음 마르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은어 중에서 ‘찌질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외모와 됨됨이가 추잡하고 더러울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모습을 하는 사람을 ‘지지리도 못난 놈’이라는 뜻으로 ‘찌질이’라고 부른답니다. 소위 이 사회 안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찌질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의 한 면만을 보고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어린 학생들부터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펼치지 못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지금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옳지 않은 것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요즘의 아이들이 말하는 ‘찌질이’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찌질이’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어떤 책에서 본 것인데, 그 답이 글쎄 ‘찌질했었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주관 없이 사는 지지리도 못난 모습과는 정반대로 지금을 살 때, ‘찌질했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좋지 않은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모습을 바꿀 수 없다면서 포기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 때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함께 할 제자 열둘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기에 앞서 복음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전해줍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지금 이 시대에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가까이 부르신 것이고,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앞으로 나아온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께 나아갔다고 해서 다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냥에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고,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도 있었으며 죽음 이후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의롭고 올바른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해서 끝까지 주님 곁에 머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부르심에 가짜로 응답해서 주님 곁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음을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모습은 과연 주님 곁을 지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 곁을 떠나는 사람일까요? 잘못된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지금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삶, 이 삶이 바로 주님 곁을 지키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늘 가까이 있다. 새벽을 깨우는 싱그러운 새소리, 우리 집 작은 창문 사이로 은총처럼 밀려드는 한 줄기 따스한 햇살로 행복은 우리 곁에 찾아온다(정연복).


필립드샹파뉴의 '최후의만찬'


마음을 다스리는 글(최천호)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근심은 욕심에서 생기고 화는 탄심에서 생기며
눈물은 경솔함에서 오고 죄는 참지 못함에서 생긴다.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입을 조심하여 남의 결점을 말하지 말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를 따르지 말라.

유익하지 않은 말은 실없이 하지 말고
내게 상관없는 말은 부질없이 시비하지 말라.

어른을 공경하고 아래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밝게 분별하되
무지한 자를 너그러이 대하라.

남에게 대우 받으려 하지 말고 먼저 남을 대우해주라.
내몸 대우 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 지나 가겄든 생각지 말라.

남을 손해 끼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돈을 너무 따르면 돈의 노예가 되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가 따르며
아껴 쓰지 않으면 집안이 결국 망하느리라.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참 제자 모습이 아닐까 싶네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매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