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수성구 2017. 1. 13. 06:46

2017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히브 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복음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어떤 책을 보다가 사랑하는 애인을 사고로 잃은 한 여인의 아픈 사연을 읽었습니다. 결혼을 불과 한 달 앞두고서 애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것입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서 혼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보니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고, 집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떨까요? 이 여인은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혼자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애인을 만나기 전, 전혀 몰랐을 때가 20년 이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인이 없어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애인 없이는 도저히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라고 스스로 단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스스로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단정을 짓는 순간, 여기에 얽매이게 됩니다. 다른 여지를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단정을 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아가는 단정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단정이 아닌, ‘나는 그 사람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단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에 구멍을 내어서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의심을 갖지요.

먼저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주님만이 이 환자를 고쳐주실 수 있어.”라고 긍정적인 단정을 내렸기 때문에 남들이 하지 않은 기발한 방법으로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라는 저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니까 저 사람을 고칠 수 없어.”라고 부정적인 단정을 내렸기 때문에 의심으로 주님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렇게 단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단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 앞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긍정적인 단정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고, 주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나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는 힘, 그것이 내 인생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입니다(법륜).


환하게 웃는 오늘되세요.


말의 상처

사람의 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또한 그런 말로 내게 상처를 주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어떨까요? 정말로 누군가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역시 긍정적인 단정을 지을 수 있다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벌레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 자리를 피하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끗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벌레 때문에 발목을 다쳤다고 말합니다. 벌레 때문에 다친 것 같지만, 사실 벌레는 이 사람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고, 우연히 이 사람이 벌레를 보았을 뿐이지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괜히 혼자 놀라고 혼자 상처 받고 그리고는 벌레 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말의 상처 역시 이렇게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그냥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그 말이 내게 큰 상처를 준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닐까요?

부정적인 단정을 지으면서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 긍정적인 단정을 지으면서 지혜롭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외국 같지 않습니까? 짧은 휴가를 마치고 이제 다시 갑곶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