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수성구 2017. 1. 15. 06:24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이사 49,3.5-6

주님께서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1코린 1,1-3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복음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혼자서 떠난 여행으로 제주도에 와서 주로 한 것은 걷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숲길, 바닷길 등을 걸으면서 좋은 공기도 마시고 많은 생각들을 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바닷길을 걷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도 문제지만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추위를 이겨내면서 앞으로 걸어가는데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부러움이 생기네요. 글쎄 바싹 붙어서 다니는 것입니다. 심지어 꼭 껴안고 다니는 연인도 보입니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저로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붙어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서로 전혀 모르는 남남끼리 이렇게 붙어 다닐 수가 있을까요? 제가 전혀 모르는 분에게 “지금 너무 추워서 그런데 우리 꼭 붙어서 다닙시다.”라고 말하면서 껴안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바로 신고가 들어갈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붙어 다닐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서로를 신뢰하고 또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강추위와 강한 바람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다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유가 자신의 어려움을 함께 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정말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고통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완벽하게 고통을 줄일 수 있는 힘을 사람에게서 얻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하시지요. 그래서 주님께 꼭 붙어 다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예수님께 꼭 붙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들어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굳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셨으면 합니다. 주님께 꼭 붙어 있습니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고통스럽다며 불평불만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으로부터 큰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만이 완벽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을 소망할 뿐이다(괴테).


세례자 요한.


지속적인 만족을 위해....

치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과 가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곧바로 치통이 멈췄습니다. 치통이 완전히 치유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단기적인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 다시 치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치통을 없애는 방법은 그토록 가기 싫은 치과에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단기적인 만족이 아니라 지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진통제로 단기적인 만족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면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코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지요.

지속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보화를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모습이 순간의 만족은 절대로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 참 기쁨과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제가 추천을 했던 수사가 어제 종신서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