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수성구 2022. 8. 28. 04:01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St Augustine-FOPPA, Vincenzo

1465-70. Wood panel. Castello Sforzesco, Milan

 

축일: 8월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St.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Bishop and Theologian

Sant’ Agost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13 November 354 at Tagaste, Numidia, North Africa (Souk-Ahras, Algeria) as Aurelius Augustinus

Died:28 August 430 at Hippo

Canonized: Pre-Congregation

Agostino = piccolo venerabile, dal latino = small venerable person, from the Latin
Doctor of Grace

 

 

 

Vision of St Augustin (detail)-CARPACCIO, Vittore

1502.Tempera on canvas.Scuola di San Giorgio degli Schiavoni, Venice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사상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록 지대하다.

하지만 성인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세인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이후로는 참회자들의 모범과 신앙의 변호자로

그리고 탁월한 사목자와 신비가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생애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처럼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를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불러 왔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은총의 필요성을 변호하고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성과 무한성을 인식할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분 안에서 즐기는(frui) 것이었다

 

아우구스띠노는 354년 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현제 알제리와 튀니지의 국경)에서

로마 제국의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 파트리치우스(Patricius)와 어머니 모니카(Monica)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외교인으로 살았으나 어머니는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보냈으며

아우구스띠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나 방탕한 생활을 할 때에도

아들의 신앙생활에 늘 관심을 가지고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그가 얻은 기도의 체험은 어린 아이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어느날 배가 몹시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를 하고 나자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겁이 많았기에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청소년기부터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한 때는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의 덕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의 기도는 혼신의 정을 다 바쳐 의지를 움직일만한 강렬한 기도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들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있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그런 경우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제의 생활이 먼 훗 날에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다소 쾌락을 찾는 생활과 마니교 사상에 빠져 기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세례성사를 준비하던 중 이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건강의 임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나은 일이 있어

그는 기도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도 체험은 바로 자신의 회개였다.

그는 자기 회개의 은혜를 어머니 모니카에게 돌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원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홈에서 www.osakorea.or.kr)

 

Baptism of St Augustine (scene 11, east wall)-GOZZOLI, Benozzo

1464-65,Fresco, 220 x 230 cm,Apsidal chapel, Sant’Agostino, San Gimignano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며 영성가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젊은이로서 사상에서나 윤리적 행위에서나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안정한 생활과 마니교에 빠져 있었으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희생,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회개, 387년 세례를 받았다.

본국에 돌아와 금욕 생활을 했다.

 

서른 일곱살에 사제로 추대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33년 동안 양 떼의 모범이 되고 강론과 저술로써 그들을 가르쳤다.

그 당시의 오류를 거슬러 용감히 싸웠고 올바른 신앙을 대가답게 전해 주었다.

72세에 선종하기까지 호교론과 신학, 철학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틈나는 데로 글을 썼으며 그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는 [고백록], [신국]의 저술이다.

"은총의 박사"라고도 불리우는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박사이며 영성가이다.

 

 

아우렐리오 아우구스티노

(Aurelius Augustinus354-430) 성인.

 

히포의 주교. 교회학자. 축일 8.28일. 북아프 리카 타가스테 출신

모친 성녀 모니카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므로 그는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

카르타고대학 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이 당시 그리스도교를 떠나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15년간 지속된 방탕생활에서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보게 되었다.

 

치체로의 를 읽고 감명받았으며(373년), 마니교를 통해 진리를 얻으려고 9년 간이나 시도,

383년에는 수사학 교사로 로마에 갔다.

 

 

이듬해 밀라노로 이주, 성 암브로시오와의 해후로, 그의 영향,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바울로에 대한 독서를 통해 개종을 결심,

카시치아쿰에서의 침잠 후 387년 부활 전야에 세례받았다.

388년 타가스테에 일종의 수도원을 세우고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391년 고향의 연로한 주교 발레리우스에게서 서품, 수도원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곧 아프리카 교회문제의 중요인물이 되어

395년 발레리우스의 보좌주교를, 396년부터 사망 때까지는 그 곳 주교를 지냈다.

 

그의 탁월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에 있다.

사제기간 중 크게 3가지의 이단 즉, Donatus 이단, Pelagius 이단, Manichaeism 문제와 대결,

이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교회와 성사, 성사적 은총 등의 문제와 관련된 교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통해 서양 신학이 형성되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구성원들의 상호 자선행위를 통해 하나를 이루며

그 구성원 때문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 신성하다.

 

교회 안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모두 있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악한 자는 남아 있을 것이다.

교회 밖에도 선한 이들이 있지만 죽기전에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성사의 집행에 있어서의 `합법성’과 `규칙’사이의 구분을 발전시켰다.

속권을 신국의 일부로 받아들이나 그것은 진정한 신에 대한 숭배와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에 있어서이며,

이단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의 조력을 인정하나 사형제는 간곡히 금하였다.

 

 

후기에는 펠라지오주의 논쟁에 종사, 타락과 원죄, 그리고 예정설에 대한 교의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예정설은 말기의 저서에서 형식을 갖추어

뒷날에 루터·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단과의 논쟁 을 통한 저서외에 <고백록>과 <신국론> 등의 대작이 남아있는데,

전자는 개종까지의 자서전이며,

후자는 로마가 알라릭에 의해 함락(410년)된 이후에 씌어진 최초의 역사철학서이다.

 

방대한 <삼위일체에 관하여>와 자신의 문학작품을 정리한 등도 전하고 있다.

후대 철학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실로 지대하여서

중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철학의 전 내용과 성야 신학의 현재의 모습을 결정 짓게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St Augustine Washing the Feet of Christ - STROZZI, Bernardo

1629.Oil on canvas, 310 x 200 cm.Accademia Ligustica di Belle Arti, Genoa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7,10.18; 10,27: CSEL 33,157-163.255)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거기로부터 내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타이르심에 당신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 왔삽고,

그리 될 수 있삽기는 당신이 나를 도와주신 때문이었습니다.

들어오고 나서 나는 무엇인지 모를 눈으로 영혼의 정신이 미치지 못하는 상주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예사롭지 않고, 육안에 비쳐지지도 않는 이 빛은,

질은 같아도 크기가 더하여서 그만치 밝기 를 더하고 모든 것을 비추는 따위의 그러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따위가 아닌 색다르고, 딴 모든 것과 아주 다른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물 위의 기름이나 땅 위의 하늘같이 내 영혼 위에 있는 것이 아니오나

나를 만들었기에 내 위이고, 나는 그의 지음을 받았기에 그 아래였습니다.

 

 

무릇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 영혼을 알며, 그를 아는 것은 곧 사랑이로소이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내 처음 그대를 알았을 때 그대 나를 맞아들여, 내가 볼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나는 아직 볼 자격이 없는 것을 보여 주었나니 .....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노라.

마치도 하늘로 부터 "나는 장성한 자의 음식이로라. 너는 커라. 이에 나를 맛보리라.

내 육체의 음식처럼 나를 네게 동화시키지 말라. 오히려 너를 내게 동화시킬 것이니라."

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는 듯 나는 얼마나 그대와는 멀리 등차의 세계에 있는지를 발견했노라.

 

당신을 누리기에 알맞은 힘을 기르고자 방법을 모색하여 보았으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 자, 만물 위에 계시어 세세에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모시기까지는 얻을 수 없었나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 부르신 그분께서 - 말씀이 살이 되심으로써 -

(나는 아직 허약하며 먹지 못할 몸이었으나) 음식을 살에 섞으셨으니

갓난이 우리에게 당신 슬기의 젖을 먹이시기 위함이었고,

실상 그 슬기로써 당신은 이미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었나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고백록’10권 27장)

 

 

*고백록:

죄악의 심연을 거쳐 구원에 도달한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눈물겨운 체험을 수록한 자서전.

그리스도교 문학과 사상의 금자탑인 이 책은, 한국에서 최초로 라틴어를 우리말로 옮긴 불후의 명작이다.

 

 

St Augustine - JOOS van Wassenhove.

c.1474.Oil on wood,119 x 62 cm.Musee du Louvre, Paris

 

아우구스티노는 33세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36세에 사제가 되고 41세에 주교가 되었다.

죄인에서 성인이 된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에 대해 단편적인 전기는 모든 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을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의 길이 하느님께로 향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자신의 삶을 사는 데 아주 열심이었던 것은 명백한 일이다.

 

어머니의 눈물, 암브로시오의 교육 그리고 성서안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 모든 것이 아우구스티노의 삶을 사랑의 삶으로 바꾸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도 늦었습니다.

오! 옛날부터 항상 계시옵고 항상 새로우신 아름다움이여!"

 

어린 시절에 인간의 향락 생활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한창 때에는 인생의 쓴맛,단맛을 다 맛보았기 때문에 맹렬한 악마의 공격에 대항해서

성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진실로 정치적,사회적,도덕적으로 퇴폐했었다.

 

 

그는 마치 그리스도처럼 비난과 사랑을 받았다.

그에 대한 끊이지 않는 비난은 근본적인 엄격주의였다.

한창때에 그는 섭리에 의해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예레미야나 다른 위인들과 같이 그는 궁지에 몰렸으나 침묵할 수 없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 20,9)

 

 

 

 

아우구스티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갈채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칼 메닝거,’무엇이 죄가 되는가’참조)

 

그는 예언자이다.

인간적 책임과 존엄성에 직면하여 도피주의를 버릴 필요를 알리는 오늘날의 예언자이다.

 

 

The Triumph of St Augustine-COELLO, Claudio

1664.Oil on canvas, 271 x 203 cm.Museo del Prado, Madrid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마태 18, 11).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이 성서 말씀의 실례(實例),

즉 많은 죄를 범하고 타락의 구렁에 빠졌다가 회개해 선량한 신자가 되고,

또는 더 많은 덕을 쌓아 성인이 된 예는 역사상에 자주 나타난다.

 

이는 바로 은총의 빛나는 승리인데,

그 중에서도 대 성인 아우구스티노는 그 유명한 참회록(고해록)으로써 세상에 널이 알려진 분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풍성한 은총의 힘으로 죄악에서 성덕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놀라울 만한 대전환을 이룬 실례로,

어떠한 죄인이라도 결심 여하에 따라 멸망에서 소생되어 광명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고도 남음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354년 11월 13일, 북 아프리카의 소도기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가톨릭은 세력을 얻어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었으나 아직도 미신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는 때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 파트리치오는 이교도인으로 성질이 매우 급하고,

명예 재산 등 현세적 사물에만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꾸준한 성격이요,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악덕에 물들까 염려해 항상 기도하고 그를 타일러 주었으나,

선보다 악에 기울어지기 쉬움은 인간의 상정(常情)인지라,

 

어머니의 엄격한 권고도 아무런 보람없이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를 따라 타락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다.

타고난 지혜와 재능이 출중함은 본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자식을 장래에 큰 웅변가로 출세시키고자 더욱 세속적 사물에만 정신을 기울이게 했다.

 

 

St Jerome and St Augustine - CRIVELLI, Carlo

c. 1490.Tempera on wood, 187 x 72 cm. Gallerie dell’Accademia, Venice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만심이 강해져 더욱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그 결과 16세에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여 아데오다토라는 사생아까지 낳게 되었다.

이러한 자식의 방탕을 본 아버지는 비로소 자기의 비행을 깨닫고 후회하며

또 아내의 눈물어린 기도와 희생을 보고 감동하여, 세례를 받고 곧 세상을 떠났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의 유언과 어머니의 탄식도 본체 만체

오로지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하며 방탕한 생활에서 회개하는 고사하고,

373년경 오히려 이원론(二元論)인 마니교까지 믿어 점점 더 이단에 빠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카르타고 대학의 수사학 교수로 있기를 9년,

그동안 마니교 연구를 계속했으나 역시 양심의 가책과 심중의 불안은 면할 길이 없었다.

거기에다 가장 친한 친구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생사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의혹을 품게 되어 더욱 번민은 심해졌다.

 

마침내 아우구스티노는 가슴에 가득 찬 그 번민을 흩어버리기 위해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향했다.

그 불효의 천벌은 곧 내려졌으니, 그는 383년경 그곳에서 그의 유일한 수사학을 강의했고,

많은 학생들은 그의 풍문을 듣고 와서 배웠으나 학비를 내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이러한 자기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여 다른 곳에 직장을 구하고자

로마 시장인 시마코의 알선으로 밀라노로 가서 그곳에서도 역시 교수 생활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니카는 멀리 아들을 찾아 카르타고에서 밀라노까지 왔다.

 

당시의 밀라노의 주교는 너무나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주교가 매우 유명한 웅변가라른 소문을 듣고 그의 강론을 자주 들으러 갔다.

처음 동기는 단지 호기심에 불과했으나 차차 열렬한 진리의 탐구욕으로 변했다.

그러는 동안 암브로시오는 모니카를 알게 되었고 이런 어머니를 모신 그 아들은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들의 영혼 구원을 탄식하여 눈물로써 호소할 때는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고 하며 위로까지 해 줄 정도였다.

 

그 말씀은 틀림없이 적중되었다. 386년의 가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와 동향인 푼시아노라는 사람이 찾아와 리비아에 사는 은수자들,

특히 성 안토니오에 대해 그 성스러운 극기 수도의 생활 상태를 이야기했다.

그때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친구인 아피리오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다 듣고 나서는 감격하여 일어서서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들이냐?

무식한 자들은 온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학문이 있다는 우리가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하고 소리쳤다.

 

 

 

This is the oldest surviving image of Augustine,
from the 6th century AD at the Lateran in Rome.

 

 

그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해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기도를 하고 있자니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하는 어린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들어와서 상 위에 놓여 있는 성서를 들어 페이지를 들춰보니, 맨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이러했다.

 

 

"진탕 먹고 마셔 주정을 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처신합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 사람이 되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 13, 13-14)라는 한 구절이었다.

 

 

 

성 안나,성 엘리자벳,성 아우구스티노와

축복된 피에로 델리 오네스티에게 둘러싸인 왕좌의 성모

1480년. 캔버스.. 240 x 328 cm.  브레라 미술관 소장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대해(大海)와 같은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 그의 개종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 33년간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회개를 위해 쫓아다니던 모니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 것인가!

 

387년 부활 축일 전야에 아우구스티노는 그 아들 아데오다토와 친구 알리피오와 더불어

성 주교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전에 맛볼 수 없었던 평화와 기쁨이 그의 마음속에 깃들었다.

그는 보속 하기 위해 수사학 교수를 집어치우고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도중 아들이 회개를 보고 오랫동안의 소원을 이룬 모니카는 모라 부근인 오스티아에 이르렀을 때

열병에 걸려 마침내 그녀의 고귀한 희생적 생활의 보수를 받기 위하여 천국으로 길을 떠났다.

그 후 아프리카에 도착하자, 아들 아데오다토도 세상을 떠났다.

 

처음은 정든 어머니를 여의고, 이제는 귀여운 아들을 잃은 아우구스티노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감수하며,

고독한 몸이 된 여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St Augustine’s Vision of St Jerome (scene 16, east wall)-GOZZOLI, Benozzo

1464-65.Fresco.Apsidal chapel, Sant’Agostino, San Gimignano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성스러움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감탄한 신자들은 그를 성직자로 추대했으며,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는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그에게 마침내 성품을 주고, 2년 후에는 부주교로 임명했다.

396년 발레리오 주교가 서거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자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그 후임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중책을 완수하기를 34년간, 반생의 비행을 보상하기 위해 전력을 경주했으며,

우선 사제인 동료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청빈을 사랑하고 기도와 연구에 온힘을 기울이는 한편,

교구 신자들을 대할 때에는 아버지와 같은 온정으로써 인도했다.

그 공동생활을 위해 정해진 규칙은 후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규율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아마도 그의 호교론과 영적 지도와 신학, 철학에 관한 많은 저서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는 초대 교회의 어느 학자보다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노시스, 도나토, 마니, 펠라지오 등의 이단들과 싸워 교회를 보호하고,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한을 보내며,

각 계급 사람들에게 덕행의 길을 가르치거나 혹은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 주기도 했다.

 

 

 

그가 육(肉)과 영(靈)의 심각한 투쟁 후 ,

주님의 은총으로 결국 영이 승리를 얻게 되어 경건한 붓으로 기록한 고백록은

고래로부터 얼마나 많은 죄인들을 절망의 구렁에서 건졌으며 회개의 길로 인도했는가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 외에 개인 생활비까지 절약해 불쌍한 과부나 고아들을 구제하며,

암흑에 싸인 이교도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는 등,

참으로 침식을 잊으면서까지 노력하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했다.

 

429년에 로마에 침입해 약탈을 마음대로 하던 반달족은 또한 북 아프리카 지방에도 침입해 히포시를 포위했다.

그때 마침 아우구스티노는 병상에 누워 자기 병고를 하느님께 바치며 신자들의 기도를 청하고

속죄의 시편 7장을 외우고 나서 곧 76세를 일기로 하늘로 올라갔다.

때는 430년 8월 28일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이름은 청사에 빛나고 영원 불멸의 그의 공적은 더욱 찬미를 받을 것이다.

Funeral of St Augustine (scene 17, south wall)-GOZZOLI, Benozzo

1464-65.Fresco, width 440 cm.Apsidal chapel, Sant’Agostino, San Gimignano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안에서 벗을 사랑하고

당신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당신 안에서 모든 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결코 하나도 잃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거절하는 사람은

어디로 도망을 치고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당신을 피함은 당신 자비에서 멀어짐이요

자신의 고뇌를 향해 달음질칠 뿐

기실 자신의 고뇌 속 어디에 가 있듯

당신 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리는 당신의 법이요

진리는 바로 당신이십니다

 

 

서재의 聖 아우구스티누스-Alessandro Botticelli

1480.Fresco. 피렌체 옹니생티 성당 소장. ltaly

 

초기 기독교회의 교부로서, 기독교 교의에 신학적 통일을 부여하고.

중세의 사상 체계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독창적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이다.

 

존재와 미의 본질을 수(numerus)로 귀결하는 일종의 기독교적

피타고라스주의자다운 학자의 세계를 상징하듯,

배후의 책에 피타고라스의 정의가 명확하게 그러져 있음을 본다.

 

고뇌에 찬, 그러면서도 비통한 얼굴 표정은 기독교적 교의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적 성품을 여실히 표현해 주고

있으며, 특히 손의 표정은 진지한 사유의 세계를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듯하다.

 

보티첼리는 엄격한 사실적 묘사 가운데.

이 한 폭의 작품 속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것을 표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아모르 수이’(Amor Sui),

곧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느님을 밀쳐냅니다’

곧 이들은 하느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자신의 것을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뜻,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지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회피하려 하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고,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모르 데이’(Amor Dei),

곧 하느님 중심적인 삶,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밀쳐냅디다’.

곧 이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을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자신의 뜻이나 자신의 지위,

심지어는 혈연 관계마저도 뛰어넘어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면서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을 찾고, 언제나 자신에게보다는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청하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십자가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