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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니 주교

수성구 2022. 9. 5. 06:44

9월 5일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니 주교

축일 : 9월 5일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니 주교

San Lorenzo Giustiniani Vescovo

ST. LAWRENCE GIUSTINIANI

St. L.Justinianus

St. Laurence Justinian

1381 at Venice -8 January 1455 of natural causes

 

베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세속의 지위를 마다하고, 알가섬의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서 일하였다.

그는 자주 어깨에 자루를 매고 다니며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교구의 재정 관리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다수의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라우렌시오도 신심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이 사망하여 5명의 자녀를 양육할 중책이 연약한 모친에게 지워졌다.

그녀는 이런 중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힘이 너무나 부족함을 알고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께 신뢰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헌히 일했다.

그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를 주셨고 자녀들은 건강하고 선량하게 자라났다. 이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모친의 기쁨이었다.

 

그 중에서 라우렌시오는 뛰어난 아이였다.

그는 1381년에 태어났고, 재주가 비상하여 온화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절과 존경심을 베풀었다.

그는 어릴때 부터 진실하여 무슨 큰 일을 이룰 것 처럼 보였다.

가끔 야심(野心)을 토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모친을 이를 경고하고,

그의 거만함을 막기 위해 "교만은 지옥에 떨어지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젠 모친의 근심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라우렌시오가 품고 있었던 야심이란 성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19세 때의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평화를 찾으려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태양과 같이 빛나는 분이 나타나 ’내 아들아! 너는 어디서 평화를 찾으려 돌아다니느냐?

네가 찾는 것은 곧 나다.

만일 네가 온전히 나에게 몸을 바치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틀림없이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하느님의 예지(叡智)’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의 꿈에 불과했으나, 내 마음은 점점 더 감동되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친척인 사제에게 전부 말했다.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칠 생각도 그에게 밝혔다.

열심한 사제는 과연 라우렌시오가 수도 생활의 성소를 받았는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그에게 고신 극기의 생활을 하도록 명했다.

어머니 또한 같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라우렌시오를 결혼시키기 위해 적당한 배우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라우렌시오는 어머니의 뜻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고별의 인사를 하며 어느 사제회에 입회했다.

 

 

입회 후 그는 즉시 고행의 생활을 시작하여 회원 일동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엄동 설한과 혹서를 잘 참으며 병고를 인내하고 겸덕을 존중히 여겨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했다. 사람의 비방을 들어도 변명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사과했다. 공부에도 매우 열심했다.

그래서 규정된 연령에 달하자 성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더욱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음인지 아직 젊은 몸으로 수도회의 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순명 서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 중책을 수락했고 현명하게 수도회를 잘 다스렸다.

그래서 그는 그 수도회의 창립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그 회를 인가해 주었다.

 

라우렌시오는 누구나 다 평등하게 사랑했으나 그들의 열심이 줄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훈계를 했다.

그는 폐가 약해 목소리가 작았던 관계로 대 웅변가는 되지 못했으나,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는 그의 깊은 신앙과 많은 학식으로 실로 출중한 강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서적을 저술하였다.

 

50세 때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러한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 부족한 사람이라며 백방으로 사양하고 다른 적당한 사람을 지명하도록 교황께 간청했다. 교황은 이를 거절하며 순명 서원을 들어 엄명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전과 같은 생활을 그치지 않고 여전히 고행의 생활을 하며 될 수 있는 데까지 청빈을 지켰다.

 

대주교로서의 그는 이상적으로 교구를 잘 다스리고 관대와 엄중을 잘 조절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물을 분배하며 교회의 권리 옹호를 위해 용감히 활약하고 아래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주었다.

 

라우렌시오의 명성은 사방에 퍼져 교황은 그를 베네치아 최초의 총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겸손되이 그 직위를 수락했으나 그로부터 4년 후인 1455년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본래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엄격한 극기 생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병한 편이었으며,

임종 때에도 부드러운 침상을 거절했으며 사후의 장례식도 극히 간소하게 할 것을 부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67일 만에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동안 그의 시체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시성식은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그는 19세 때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처녀로부터 영원한 지혜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본적인 욕망에 만족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참된 행복을 찾아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성 라우렌티우스는 산 지오로지오(San Giorgio)의 아우구스티노회에 있는 그의 삼촌 마리노 퀘리노(Marino Qeurino)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삼촌은 그에게 수도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집에서부터 명예와 부 그리고 세속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수도자적인 금욕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그의 건강을 염려한 그의 어머니는 결혼 계획을 통해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삼촌의 충고를 감추고 성 라우렌티우스는 어머니의 소망을 거부하고 대신 삼촌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자주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산 지오로지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생활과 참회의 생활을 통해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또한 미사 집전을 통해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돕고, 그들이 거듭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켜 주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그는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의 행정과 재정 관리 등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는 그를 베네치아 교구의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1456년 1월 초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또한 라우렌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n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노 유스티니아노)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