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26일 성녀 엘리사벳 비쉬엘 데 아제스

수성구 2022. 8. 26. 04:56

8월 26일 성녀 엘리사벳 비쉬엘 데 아제스

축일: 8월 26일

성녀 엘리사벳 비쉬엘 데 아제스

Santa Giovanna Elisabetta Bichier des Ages

ST.JEANNE ELIZABETH des Bichier des Anges

St. Elisabeth Bichier des Ages

July 1773 at La Blanc, France - 26 August 1838

Canonized :1947 by Pope Pius XII

 

프랑스 러 블랑의 샤토 데 아제스에서 그 지방의 영주인 안토니 비쉬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죠안 엘리사벳 마리 루시로 세례를 받았으나, 항상 엘리사벳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프와티어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받았으며,
그녀의 부친이 의회의 몰수령으로부터 가족의 재산을 성공적으로 방비한 뒤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1796년, 그녀의 모친과 함께 프와티에 근교인 베티네스로 이사한 후부터
혁명 정부의 사제들과 무신론자들을 배격하면서 시골에서 홀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797년, 그녀는 성 안드레아 푸르네(축일:5월13일)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성 안드레아는 그녀가 교육에 종사하면서
병자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푸는 수도회 창설에 따른 규칙을 주었다.
1804년, 그녀의 모친이 운명하자, 그녀는 프와티에의 가르멜 수도원의 수련자가 되었으나,
섭리회로 가서 푸르네 원장이 계획하는 수녀들의 공동체 일원이 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엘리사벳은 어린이를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 단체는 1807년에 서원을 하였고, 1816년에 프와티에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811년과 1830년 사이에 60개 이상의 수도원이 생겼다.

이 수녀회가 보통으로 성 안드레 사도 수녀회로 불렸으나 공식적인 명칭은 십자가의 딸 수녀회이다.
엘리사벳은 점잖하고 온순한 여성으로, 많은 여행으로 경험을 얻었고,
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극히 단순한 여성으로 비쳤다.

 

그녀가 1834년에 임종할 때, 바스크 사제인 성 미카엘 가리코아츠(축일:5월14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성 미카엘이 베타람의 성심 사제회라 부르는 선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7년 교황 비오12세깨서 시성하였다.

 

 

 

 

 

축일: 5월 14일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

San Michele Garicoits

Bassi Pirenei, Francia,15 aprile 1797

- Betharram, Francia, 14 maggio 1863

 

성 미카엘은 피레네 산중의 작은 촌락에서 가난한 어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중생활이 대부분인 그는 여늬 아이들과 다름없이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었지만,

가끔씩 자기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은 "돈이 없다"는 식으로만 말했지만, 그의 할머니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쌩-팔레스본당 신부께 찾아가서 손자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그 본당신부의 주선으로 그 지방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모는 학비를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당이나 주교관에서 일해야만 하였다.

 

이 학생은 시골 목동이지만 매우 현명하고 또 건강했다.

더우기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세로 노동과 공부를 했던 결과,

"우리의 알로이시오 곤자가"란 별명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축일:6월21일

Saint Aloysius Gonzaga (Jesuit):1568-1591년.예수회.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

 

이리하여 그는 1823년 12월에 사제로 서품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캄보의 보좌 신부로 출발한 그의 사제생활은 처음부터 얌센니즘과 싸워야 했으나,

예수성심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주 성체를 모시는 관습을 보급하여 극복하려고 애썼다.

그다음 부임지는 베타람 소신학교였다.

여기서 경험을 얻은 가리고이트 신부는 다른 2명의 사제와 함께 독단적인 봉사를 꿈꾸게 된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제 양성 계획을 구체화 시킬 심산으로

3명의 동료와 함께 공동체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가 뚤루즈로 가서 예수회원인 러 블랑신부를 만났는데,

그 신부는 가리고이트 신부의 마음을 활짝 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격려까지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성 이냐시오의 자녀들과 같은 규칙에 근거하는 회헌을 만들고

계획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것이 소위 "베타람의 성심 사제회"이다.

이 사제회는 그가 죽은지 14년 뒤에 성좌의 인가를 받았다.

 

 

 

 

 

축일 : 5월 13일

성 안드레아 푸르네 사제

Sant’ Andrea Uberto Fournet

St. Andrew Fournet

Maille, Francia, 6 dicembre 1752

-13 maggio 1834

 

 

프랑스의 프와티에 근교 태생으로 청년시절에

그는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일상 생활도 한 마디로 엉망이었는데,

교구 성직자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으며, 자기 고향 마이예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그는 성직자 법의 맹서를 거부하였다.

그는 비밀로 사도직을 수행했으며, 1792년 성 금요일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수례에 실려 감옥에 끌려가는 것에 대하여 항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바로 이 날,

그 분을 따르는 내가 수레를 타고 갈 수 없다"하여 그는 걸어서 갔다고 한다.

 

푸르네는 성녀 엘리사벳 비쉬엘과 교분이 많았는데,

1801년 이후부터 그는 그녀를 도와 십자가의 딸 수녀회 창립에 공을 세웠다.

그는 1820년에 자기 교규에서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이 수녀회를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