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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성왕 루도비코 9세

수성구 2022. 8. 25. 02:53

8월 25일 성왕 루도비코 9세

축일: 8월 25일
성왕 루도비코 9세
San Ludovico (Luigi IX) Re di Francia
St. Louis IX, King of France
SAINT LOUIS—CONFESSOR, KING OF FRANCE
Born :25 April 1214 at Poissy, France
Died :25 August 1270 at Tunis, Algeria
Canonized :1297
Ludovico = variante di Clodoveo
Name Meaning :famous warrior
재속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 3회 주보성인   

 

 

프랑스 국왕 루도비코 9세(1215 - 1270)는 빠리 근처 뽜시 출생으로 12살에 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칸 교사들로 부터 교육을 받았고 후에 3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왕이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의 궁핍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십자군 원정 중 성지에서 사라센인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석방되자

프랑스에 돌아와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두 번째 십자군 원정 중에 병든 병사를 간호하다 전염된 역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프란치스코3회의 주보 성인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루도비코는 ’정의’로 대변되는 사람이다.

그는 국왕으로 재위하면서 뇌물을 금지했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증인을 채택하는 법을 세웠으며 법정 기록을 남기도록 하였다.

한번은 어떤 백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토끼를 사냥하였다는 죄목으로 세 아이들을 교수형 시켰다.

진노한 왕은 평민 출신 재판관들에게 백작을 심판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운 마음도 컸던 루도비코는

사형 대신 벌금으로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 벌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였다.

 

정의라는 라틴어는 어원적으로 ’올바른 것(justitia)’뜻하는 반면,

’심판’이라는 말은 ’법(jus)’과 ’말하다(dicere)’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법을 말하는’ 심판에는 자비나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의는 법을 자구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신에 따라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정의 안에는 항상 자비로움이 있어야 한다.

루도비코가 심판자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찬왕으로 알려진 성 루도비코는

1214(1215)년 프랑스왕 루이 8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두터운 신심에서 나온 정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고 친히 그들을 잘 길러냈다.

성 프란치스꼬 제3회에 입회하고 기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탁월했다.

왕국을 다스릴 때 국민들의 평화와 물질적 진보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신적 진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자유로이 참배할 수 있도록 두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1270년 카르타고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왕이 되는 대관식에서 루도비코는

하느님이 도유하신 백성의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행동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다른 왕들도 물론 똑같은 맹세를 하지만

루도비코가 왕으로서의 의무를 신앙에 비추어 수행한 점이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었다.

 

두 차례의 폭동을 겪은 후 그는 평화와 정의를 가져왔다.

루도비코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그의 어머니인 카스틸의 블랑쉬가 통치했다.

그는 19세 때 12세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마르가리타의 건방지고 침착하지 못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 가득 찼다.

 

루도비코는 30세 때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의 군대는 나일강의 다미에타를 점령했으나 얼마 후 이질 때문에 허약해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포위되어 마침내 포로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배상금과 함께 다미에타를 포기함으로써 군대를 석방시켰다.

그는 4년 동안 시라아에 머물렀다.

그는 십자군으로서도 칭송을 받았지만 더욱 큰 명성은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때 드러나는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개혁 법안의 창시자로서 신하들에 대한 법규를 제정했다.

그는 신앙 증거의 시험 형태로 전쟁에 의해 시련을 겪었으며, 법정에서 성문화된 기록을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루도비코는 교황권을 항상 존중했지만 왕족의 이익도 수호했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파문하여 그를 공격하려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황제를 화해시켰다.

그는 병원을 짓고, 환자를 방문하고,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나환자를 돌보는 등 그의 백성을 위해 일했다.

(그는 성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3회원이었다.)

 

 

루도비코는 프랑스-영주와 읍민들,농부들 그리고 사제들, 기사들-를 그의 인격과 성덕의 힘으로 통일했다.

오랫동안 국가는 평화로웠으나 모슬렘이 시리아로 진격하게되자 평화는 깨졌다.

그는 1267년, 42세에 제2십자군을 이끌었다.

 

그가 이끌던 십자군은 루도비코의 형을 구하기 위해 튀니스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한달 만에 질병으로 많은 사람을 잃었고 자기 자신도 이국 땅에서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27년 후에 시성되었다.

 

 

루도비코는 강한 의지와 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의 말은 매우 진실했고 행동에서는 용기가 뛰어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점은 그가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

특히 주님의 비천한 양떼들에게 존경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백성을 위해 대성당,교회,도서관,병원,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영주들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다루었다.

그는 자기에게 생명과 가족과 조국을 주신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대하기를 원했다.

 

 

루도비코는 매일 13명의 특별한 손님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으며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의 궁전 가까이에서 식사를 제공받았다.

 

대림절과 사순절 동안에는 그에게 오는 모든이가 식사를 대접받았고,

루도비코 자신도 간혹 그들에게 봉사했다.

그는 통치 지역 전역에 걸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구제했다.

 

 

성 루도비꼬가 자기 아들에게 남긴 영적 유언에서

(Acta Sanctorum Augusti 5 [1868], 546)

 

의로운 왕이 이 지상을 진보시킨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들아,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온갖 대죄를 멀리해야 한다.

어떤 대죄를 범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네게 시련이 닥쳐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너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그것을 인내로이 견디어 내고,

그 시련은 네 유익을 위한 것이고 아마도 네가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어떤 좋은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면 주님께 겸손히 감사드리고,

헛된 영광이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그 선물이 너에게 더 해로운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네게 주신 바로 그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바치는 기도에 기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여라.

그리고 교회 전례에 참여하는 동안 시선을 흩트리지 말고 잡담하지 말며

염경기도를 바칠 때나 묵상기도를 바칠 때나 경건히 주님께 기도하여라.

 

가난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고 위로해 주어라.

하느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려라.

그러면 한층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리라.

네 수하 사람들을 언제나 정의롭게 대하며 좌우 어느쪽으로건 기울어지지 말고 중도를 택하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못할 때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자 편에 있어라.

너의 모든 수하 사람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 평화와 정의가 깃들이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라.

 

우리 자모이신 로마 교회와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 공경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네 왕국으로부터 온갖 죄악 특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와 이단을 몰아내는데 힘써야 한다.

지극히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강복을 너에게 내린다.

성삼위와 모든 성인들께서 너를 온갖 악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주께서 너에게 당신의 뜻을 이행할 은혜를 내려 주시어

네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 드리며 현세 생활이 끝난 후

우리함께 그분을 뵙고 사랑하며 영원토록 찬미 바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아멘.

 

 

Scenes from the life of Saint Louis: king of France: (BNF, FR 2813) fol. 265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France, Paris, 14th Century. (220 x 145 mm; 75 x 70 mm)

 

13세기는 세도(世道)와 같이 인심이 퇴폐하고 신앙 도덕이 위기에 봉착한 한편,

하느님의 섭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도미니코, 성녀 클라라 등

위대한 성인 성녀들을 배출하여 그 위기를 구원케 하신 때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제3회 회원들의 훌륭한 모범은 세상 사람들의 사기를 돋우었고,

그 감화력은 유럽 각국에 뻗쳤을 뿐 아니라 제왕의 궁전에 까지 미쳤다.

후에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로서 추대를 받은 프랑스의 황제 성 루도비코는

아시시 성인의 청빈 및 사도적 열성에 감격하여 열심히 그 뒤를 따르기에 노력한 결과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된 분이다.

 

 

이 고귀한 신분인 성자는 1215년 4월 25일, 프랑스 포아시 궁저에서 루이 9세로 태어났다.

그가 후에 성인이 된 최초의 원인은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 블랑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실로 그 어머니 블랑슈는 천성의 미인이요, 탁월한 재주와 그 위에 신앙과 성덕에 출중했으며,

그 아들 루도비코에게 어릴 때부터 경건한 생활의 길을 가르쳤다.

 

"나는 어떤 어머니에도 못지않게 너를 애정으로써 대한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거슬러 대죄를 범한다면

너는 내 앞에서 오히려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하며

부드러운 어린 마음속에 죄악을 두려워하는 정신을 깊이 박아 주었다.

그리고 루도비코는 이런 어머니의 교훈을 생전 잊지 않았다.

 

어머니 블랑슈는 종교 교육만으로 그치지 않고,

지육(知育) 체육(體育) 문무를 겸한 교육을 등한히 하지 않았다.

원체 다재(多才)인 루도비코는 하는것마다 안 되는 것이 없었으며, 어려운 라틴어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어,

이것으로써 그의 신학적 지식을 넓히는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방편으로 삼았다.

 

1226년, 부친 루이 8세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햇으므로,

어머니 블랑슈가 정권을 맡았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상파뉴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했으나,그녀의 현명함과 성덕으로 국가를 어려움에서 여러번 구출했다.

1234년에 왕자 루도비코가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문드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자

어머니 블랑슈는 곧 정권을 아들에게 넘겼다.

 

루도비코는 자기의 약함과 왕위의 중책을 생각하여 구약 시대의 솔로몬 현왕과 같이

장수(長壽), 부유, 전승(戰勝)등을 탐구하지 않고,

오로지 국내에 선정을 베풀기 위해 칙서를 냄에 있어서도 성령의 지혜로 비춰 주시기를 청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대에는 과거나 미래에도 없을 선정이 베풀어졌으며,

국민 전부가 태평을 즐기게 되었고, 어디서든지 왕의 성덕을 구가(謳歌)하지 않은데가 없었다.

처음엔 신하들 가운데 임금의 나이 어림을 비웃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얼마 안되어 그들도 왕의 권위 앞에 굴복했다.

 

 

왕은 빈민 혹은 불행한 국민에 대해서는 한없는 동정을 베풀었고,

만일 어떤 고관이라도 이유없이 그들을 압박하든지 부정한 행위를 한 자에게 대하여는

추호도 용서함이 없이 처벌했다.

또 고리대금, 허식 및 겵 등 사회의 악을 배제하고 몸소 실천하여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주며 완덕의 생활을 장려했다.

 

기도는 보통 신앙인의 척도다.

루도비코가 기도하기를 즐겨한 것은 만민이 다 아는 바이다.

매일 두 대 혹은 세대의 미사에 참여하고 고해 신부와 더불어 성무 일도를 바치며

지금처럼 자주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그는 2개월에 한 번씩 꼭 영성체를 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올 대는 마치 주님의 대전에 대령하듯이 엄숙한 태도였으며,

천상의 만나를 받아 모시는 모습은,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이 그이 경신(敬神)하는 마음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나 보였다 한다.

 

 

하루는 어떤 신하가 그의 신심을 비난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하자

왕은 "만일 내가 미사 참여가 아닌 사냥이나 노름으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면

귀관들은 나를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종교 문제라면 비난을 하니 실로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경건하고 독실한 루도비코인지라,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자연 외부에 나타났으며, 모두 미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도 신분에 적합치 않은 절제 금욕의 생활이며,

빈민 병약자에대한 자애심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성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이 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는 성직자들을 깊이 존경하며 그들중에서 왕실 고문까지 선택했고,

프란치스코회의 수사들에게 대해서는 각별한 신뢰와 경의를 표명했다.

 

 

이러한 임금의 자선 미담을 두서넛 들어보자.

그는 매일 120명의 빈민에게 음식을 주었고 특히 사순절 동안에는 더욱 많은 빈민을 대접했으며,

손수 불쌍한 나병 환자의몸을 씻겨주고 이들을 친구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자비심은 국내에 뿐만 아니라 멀리 사라센 민족에게 노예가 되어있는 신자들에게까지 뼏쳐

그들의 석방을위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동 로마 황제 바르두인 2세는 루도비코의 성덕을 감탄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국보로서 보관하고 있던
예수의 가시관을 그에게 선물로 보내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도비코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손수 그 성물을 받들어 모시고 행렬하며 이미 아름답게 꾸민 소성당에 안치했다.

 

그 후 왕은 중병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이를 감사하는 뜻으로 사라센 인의 수중에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고, 1248년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처음에는 매우 순조롭게 연전 연승(連戰連勝)했으나 불행히도 악성 유행병이 만연하여 다수의 사병들이

사망했으므로  군의 사기는 상실되고 사라센 군에 패배하여 왕 자신도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요구하는 거액의 대가를 치르지 못하여 마침내는 생명의 위험에까지 직면했으나

인자하신 하느님의 안배로 간신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남은 장병을 모아 팔레스티나의 아콘에 가서 자기 홀로 성지(聖地)의 이곳 저곳을 순방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 블랑슈의 서거 비보를 받고 귀국했으나 그 사이 관리들의 풍기는 문란하고

탈세 등으로 사복을 채우고 백성들을 압박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그는 즉시 손을 대어 오리(汚吏)들을 엄벌에 처하며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사재(私財)를 털어 보상해 주었다.

 

그리고 십자군 유가족들의 위문 구호에 만전지책(萬全之策)을 강구하고

다수의 성직자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유명한 소르본 대학을 창설했다.

 

루도비코 왕은 예전의 십자군의 대 실패를 잊지 못하고

1267년에는 파리에 신하 일동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성물과 가시관을 제시하며

뜨거운 눈물로써 일대 열변을 토하며 그들의 찬동을 얻어 십자군의 재기를 도모했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금 대군을 친솔(親率)하고 아프리카의 주니스에 상륙하게 되었으나,

뜻밖의 열병에 걸려 병석에 누운 지 6일만에 평소의 소원이던 지상의 성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하늘의 성지, 영원한 예루살렘으로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임종 때 그는 양손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과 같이 벌리고,

"주여 나는 거룩한 당신 집에 들어가 주님의 성전에서 당신을 숭배하며,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나이다"하며 시편을 숨가쁘게 읊고나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2, 3개월 전에 사라센의 사자(使者)에게

"내가 당신의 황제에게 세례의 은혜를 줄 수만 있다면

나는 쇠사슬에 얽매어 사는 노예의 신세도 서슴지 않겠다’고 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더 위대한 생명을 희생한 것이다.

 

생전에 성인으로 존경을 받던 왕의 서거 비보가 전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의 덕을 추모하며 자비로운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의 전구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당연 성인의 위에 오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둘도 없는 성왕으로서 그 이름이 청사에 남게 되었다.

 

 

1297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시성하였으며,

성인의 유해는 쌩 데니 수도원 성당(Abbey Church, Saint-Denis)에 안치 되었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가톨릭출판사)에서

 

 

 

St Louis of France and St Louis of Toulouse-SIMONE MARTINI

1317.Fresco, 215 x 185 cm.Cappella di San Martino,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예수성심성당(Sacre Coeur)-몽마르뜨(Montmartre)

 

 

 

예수성심성당(Sacre Coeur) 정면

 

가운데: 예수성심상

왼쪽: 성루도비코9세(축일:8월25일.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인)가 왼손에 가시관을 들고 계신 기마상,

오른쪽: 잔다르크(축일:5월30일,3회원,프랑스의 수호셩녀)의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