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23일 성 필립보 베니찌

수성구 2022. 8. 23. 03:04

8월 23일 성 필립보 베니찌

St Philip Benizi
Detail from Presentation in the Temple
Filippo Lippi, 1466-68, S. Maria dei Servi, Prato
St Philip Benizi is a saint of the Servite Order

 

 

축일 : 8월 23일
성 필립보 베니찌
St. Philip Benizi
St. Philippus Benitius, C
St. Philip Benitius
Born:15 August (Feast of the Assumption) 1233 at district of Oltrarno, Florence, Italy
Died:22 August (Octave of the Assumption) 1285 at Todi, Italy; buried in Todi
Canonized :1671; first Servite to be canonized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와 파두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그는 즉시 플로렌스에서 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 일년을 일한 후, 몬떼 세나리오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회에 입회한 것이다.


그는 1258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설교로 더욱 유명해졌고, 나중에는 총장까지 되었다.
그는 수도회의 회칙을 제정하였고, 오또부오니 추기경이 그를 교황 후보자로 추천하였을 때,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어느 동굴에 숨어 살았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여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녀 율리아나를 도와서 성모의 종 수도회 3회를 창설토록
적극 지원하였음은 물론, 회원들을 극동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1285년,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고는 또디 수도원에서 은거하다가 운명하였다. 1671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필립보 베니치는 1233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귀족 베니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녀가 없는 부모는 성모께 기도하여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요행히도 8월 15일, 즉 성모 승천 축일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러했음인지, 성모께서는 그의 일생을 통해 도움의 손을 거두지 않으셨고,
소년 시대로부터 청년시대를 통해 유혹 중에서도 그의 정덕을 백합화와 같이 깨끗이 보존케 하셨다.


파리에 유학하고 있을 때가 그에게는 가장 위험한 시기였으나,
성모께서는 그를 고향인 플로렌스에 귀환토록 안배하시어 그의 타락을 면케 해 주였던 것이다.

그는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그는 즉시 플로렌스에서 의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로부터 15년쯤의 전의 일이다. 플로렌스의 경건하고도 독실한 일곱 명의 부호가 서로 뜻을 같이해
성모를 공경하고 그 거룩한 생활을 본받기 위해 "성모의 종"이라는 수도회를 조직하고,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산중에 모여서 모범적인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세인에게 훌륭한 표양을 주었다.

 

필립보도 본래 신앙심이 두텁고 수도 생활에 뜻이 있었는지라, 그들의 성스러운 생활 태도를 보고
감동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밤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한쪽은 절벽이 천길 만길 하늘 높이 솟아 있고, 또 한쪽은 밑도 안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샛길을 땀을 흘리며 지나갔는데, 어쩌다가 길을 잃었을 무렵 한 마리의 독사가 비치는 마차가 나타났고,
그 위에는 성모께선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시면서 성모의 종 수도회의 수도복을 그에게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필립보는 이튿날 즉시 그 수도회의 원장을 찾아가 겸손한 태도로 입회를 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지위로는 귀족이요, 학식으로는 박사인 그는 이제부터 일개의 수도자로서 어떤 때는 밭에서,
어떤 때는 부엌에서 서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의 출중한 덕행을 본 원장은 그를
그저 버려두지 않고, 수련기가 끝나자 곧 그를 시에나에 있는 수도원에 파견해 수련장으로 임명했다.

시에나로 향하던 도중의 일이다. 도중에서 도미니코회 수사 두명을 만났다. 그들은 라틴말로 질문을 했다.
그에게 라틴어는 문제도 아니었으므로 거침없이 술술 대답했다.

 

이에 그의 인격과 성품을 안 수사들은 서로 놀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평수사로 썩히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니 꼭 신부가 되도록 해야 되겠다고 하며
그 즉시로 성모의 종 수도회의 총장을 만나 필립보를 사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했다.
총장도 이에 동의해 곧 그로하여금 사제 서품 준비를 시켜 마침내 신부가 되게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창립자 동료들은 불과 33세의 젊은 분이지만, 학덕면에 있어 필립보를 따를 자가 없음을 알고
1267년에는 그 회 총장의 중책을 맡아보도록 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내란이 계속되고 이단과 사설(邪說)이 성행하고 그 외의 재앙이 연거푸 일어났으므로
자연 그리스도회도 큰 타격을 받았으나, 현명한 필립보의 수완으로 인해 많은 위기를 면하고 수도회의

대 발전을 보았을 뿐 아니라, 성모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독일과 프랑스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일대 발전을 했다.
또 그는 성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각국을 순회하며 설교와 덕행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이단자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이탈리아 내란의 주요 중심지인 아레쯔오, 피스토야, 볼로냐, 플로렌스 등지의 악화된 민심을 진정하게
하고, 평화의 사도로서 그들의 감정을 조정하는데에 진력했다. 때로는 불순한 이들의 피해를 받은 때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원한을 풀고 성모의 제대 앞에서
화목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열렬한 활동은 후에 그의 몸에 쇠퇴를 가져왔다.

1283년, 필립보는 갑자기 열이 높아지며 병상에 눕게되어 그 길로 다시 회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 전 세시간은 참으로 마귀의 유혹이 심했다 한다.
그는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며 성모님의 도움을 입어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숨이 마지막 넘어갈 때 동료들이 십자가를 떼어서 그에게 주니 그는 지성어린 친구(親口)를 한 동시에
조용히 눈을 감고 만 것이다. 그 날은 8월 22일이요, 성모 승천부터 한 주일이 되는 날이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23일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