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8. 21. 06:09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1주일다해

 

복음: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구원에 관한 질문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어려운 문제임은 틀림없다. 오늘 복음은 당시의 신자들과 우리가 모두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보장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면서, 이제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수 있는 분으로서 가르치신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라는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은 유다인이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랍비 메이르(Meir)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신앙고백문인 셰마(Shema) 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도 하시지 않고, 많다고도 하시지 않는다. 다만 구원으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면서 상징적 개념으로서 절박함을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 문을 닫아버려 문밖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집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고 또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선을 행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모르겠다고 선언하시는 “불의를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 정반대의 관점에 있는 사람만이 그 특권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오늘 복음 전체를 보면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특권, 즉 율법, 할례, 선민사상을 자랑하며 뽐내던 그 보증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기서 루카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 즉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따르는 의무와 자기 고유의 사명을 수행하여 완수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주 적어 보이지만, 그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하늘나라는 특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위한 우리의 결단과 선행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은총을 통해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지해야 하고 누려야 한다. 그 나라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들어간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만이 분명 이사야가, 바벨탑으로 상징됐던 그 분열의 모습과 대립하는 종말의 시대에 이루어질 구세주의 보편성과 형제적 사랑을 그리며 보여주었던(창세 10장; 이사 66,19 참조) 새로운 사랑의 바벨탑을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명감으로 항구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