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

수성구 2022. 8. 20. 04:13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

 

에제 43,1-7; 마태 23,1-12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22.8.20.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때는 바빌론 유배 시절이었습니다. 다윗 임금을 비롯해서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목자들에게 기대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잔뜩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윗과 유다 왕조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셨다던 축복(2사무 7,11-13)조차도 의구심이 생겨났기에 자칫하면 하느님께 대한 신앙마저 흔들릴 판이었습니다. 여러 예언자들이 메시아 도래의 희망을 메시지로 전하기 시작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매우 선명하게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그려냈지만, 에제키엘은 메시아의 고난으로 인한 하느님의 영광을 그려냈습니다. 

 

  예언자의 상상력이라 해도 그가 본 환시의 형체는 그가 생애 동안에 겪은 체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배경이 되었고, 다만 환시의 내용이 대단히 포괄적이고 묵시적입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의 동쪽에서 밀려와서 성전을 가득 채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 영광으로 가득 찬 성전 즉 주님의 집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몰려들게 되리라는 것도 내다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밀려와서 성전을 가득 채우는 일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몰려드는 일, 이 두 가지 징표는 예수님 당시에도 실현되지 않았고, 초대교회 250년 동안에도 그러했으며, 단지 로마화된 서방교회의 라테란 대성전이나 베드로 대성전에서 큰 전례 행사에서나 비슷하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내다본 환시의 징표적 성격은 전례에서 일어날 일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신앙이 사사화(私事化)되고 그나마 신앙의 열기마저 식어가는 서방교회의 상황은 에제키엘의 환시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이미 수백 년 간 지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을 이미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악표양을 반면교사로 삼아 배격하는 대신, 예수님의 선표양을 정면교사로 삼아 본받는 일입니다. 

 

  첫째,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실행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이 뒷받침되는 말씀이었기에 그분의 말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 

 

  둘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백성을 짓누르고 억압하며 착취하고 있었기에 백성들이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짊어져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백성들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도록 함께 짊어지셨고 대신 당신의 편한 멍에를 어깨에 올려놓아 주셨습니다. 그분의 멍에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셋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가 하면 윗자리를 탐내며 인사받고 존경받기를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외딴 곳이나 산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좋아하셨는가 하면 이런 저런 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감사하기를 잊어버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섬김과 겸손의 리더십이 주님의 영광을 가득 차게 하고 주님의 백성을 주님 곁으로 불러 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의 극치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이미 이런 가르침을 들어 알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지만, 거의 한 세대 동안 숙고한 다음에야 십자가 죽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결과일 뿐임을 깨닫고 신앙으로 고백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5-11).

 

  이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도와주며 떠받들어주는 일은 고달픈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게 되어야 비로소 믿는 이들이 그 영광의 빛을 받으러 하느님의 집에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에제키엘이 내다보았고 또 예수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실현된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자기비허의 리더십, 섬김과 견손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길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로마를 그리스도교화시킬 수 있었던 비결도 역시 이러한 자기비허의 리더십, 섬김과 겸손의 리더십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면서, 부활신앙으로 힘을 얻고 공동생활 양식으로 그 기운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