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수성구 2022. 7. 29. 05:4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1요한 4,7-16; 요한 11,19-27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2022.7.29.; 이기우 신부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와 성 마리아와 성 라자로 가족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맺으신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해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인간관계는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동심원과 같습니다. 제일 가까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계시고, 그 둘레에 하느님의 가족으로 삼으신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또 제자들의 주위에 질병이나 마귀들림 등 여러 가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러 모여 들었던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 있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주의 깊게 듣던 사람들을 골라서 뽑으신 사람들이 열두 제자였을 것입니다. 또 이 군중 속에서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된 이들 중에는 이 열두 제자처럼 집과 직업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영위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토박이 제자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라자로와 그 동생들은 토박이 제자였습니다. 라자로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인 베타니아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시달려 지치고 피곤할 때면 이 라자로 가족에게로 와서 쉬셨습니다. 혼자서만이 아니라 열두 제자와 함께 그리하셨을 테고, 공생활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도 낮에는 도성 안에서 군중을 가르치셨지만 밤에는 이 가족에게로 와서 지내시며 애틋하고 자유로이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족은 위에 언급한 공적인 인간관계와는 조금 떨어진, 사적인 인간관계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선포 활동으로 인해 매우 긴장스럽고 피곤할 수도 있는 인간관계와는 조금 다르게, 이 가족은 이 긴장을 덜어주는 그래서 마음 편한 인간관계였던 셈입니다.  

 

  우선 언니 마르타는 음식 시중을 드는데 솜씨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지친 예수님과 제자 일행으로서는 원기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빵의 기적 사건 당시의 분위기를 연상해 보시면, 마르타의 역할이 예수님께 얼마나 고맙고 필요했었을 것인지 비교가 되실 것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따라다니던 군중은 자신들이 받을 수 있다고 기대되는 혜택을 받는 데 익숙했던 이기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며칠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가 몹시 허기졌을 무렵에 그분은 군중의 허기를 달래주려고 빵의 기적을 일으켜주셨는데, 빵을 배불리 먹고나서도 이 빵을 매일  달라고 쫓아다닐 정도였으며, 그 빵이 세상에 주는 빵과 달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라는 본격적인 가르침을 알려주자마자 궁시렁거리며 미련 없이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그런 이기적인 군중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장정만도 열 사람이 넘는 대식구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일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마치 봉사의 달인처럼 이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와는 또 다른 역할로 예수님을 맞이했는데, 지쳐서 오신 그분께서 가슴 속에 품으셨던 말씀을 들어드리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군중은 대체로 무언가 도움이 필요해서 왔으므로 이해관계에만 민감했던 무리여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바람대로 그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새겨서 믿음을 깊이 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마리아는 깊은 믿음으로 그분의 속내까지도 알아들으며 가르침을 잘 들어드렸고, 따라서 예수님께는 지친 육신의 원기를 북돋워주는 음식 시중 못지않게 꼭 필요한 몫이었습니다. 

 

  오빠인 라자로는 두 여동생이 해 내는 음식 시중이나 말씀 시중 모두에서 두루 살피며 예수님의 절친한 말벗이 되어 드린 편이었던 듯합니다. 라자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두 자매가 예수님께 급히 전갈을 했던 사정을 보아도 그렇고, 막상 라자로가 숨진 후 예수님께서 슬피 우셨던 정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미 숨진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기와 장소 등 여러 정황상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 질 것이 뻔한 일이었는데도 감행하셨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문상하러 오신 그분을 맞이하러 나온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사도 요한이 증언하다시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기준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요청받고 있고, 이런 요청 위에서 다양한 수준의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와 맺으신 인간관계가 그 실체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서 공사간에 서로 사랑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성심껏 돕고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관계이며, 부활 신앙의 지평을 열어줌으로써 이러한 믿는 이들의 인간관계가 하느님의 사랑에 기반해서 튼튼하게 이루어지도록 해 주는 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