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수성구 2022. 6. 13. 01:59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1열왕 21,1-16; 마태 5,38-42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2022.6.13.

 

  한처음에는 모든 땅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물질생산력도 증가하면서 국가가 성립하여 국가의 권력으로 법을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 법률에서 토지로 인한 분쟁을 예방하고 제한하며 조정하고자 토지소유권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오늘 독서의 배경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에게 토지가 무상으로 분배되면서 토지의 개인소유권 개념이 인정되지 않는 희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희년법의 권위는 토지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창조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면 이렛날에 일을 쉬어야 하는 안식일 법처럼, 사람도 여섯 해 동안 일하면 이레째 되는 해에 직업을 쉬어야 하는 안식년 법이 생겨났고,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 맞이하는 안식년 다음 해에는 땅도 쉬게 해 주는 법이 희년법입니다. 50년째 되는 희년에는 모든 땅은 그 동안의 토지 거래와 소유권 변동 사항을 모두 무효화시키고 나서 원래 하느님께서 분배해 주신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희년법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 오늘 독서에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바로 사마리아 임금 아합 같은 힘센 자들이 희년법의 이상을 외면하고 돈으로 사들여서 자기 소유로 만들려 했던 일, 희년법의 정신을 알고 있는 포도원 주인 나봇이 그 토지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으므로 거래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이제벨 왕비 같은 악인이 힘과 술수를 부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 땅을 빼앗는다든가 하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던 나라에서 시집온 이제벨 같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희년법 같은 고귀한 이상과 질서를 알 리 없었고, 우상숭배 풍조의 폐해는 이런 폭력 선호 경향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권력의 상층부가 이상 대신 권력을 앞세워 폭력을 휘두르면 이는 수직적으로 권력의 기층부로 내려가서 수평적으로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집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더 센 사람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 현상이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이를 흉내낸 유신 독재 시절에, 전국에 군사문화가 판을 쳤고, 학교에서도 폭력이 일상화되었던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권력 엘리트들뿐만 아니라 로마의 말단 병사들까지도 툭 하면 길 가던 민간인을 붙잡아 자신들의 군수물자를 나르게 하는 일이 흔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뺨을 때리거나 재산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중에 오른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오른손의 손등으로 때리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모욕적인 폭력을 당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무기를 들고 가서 학살하며 정복하고 개종도 시켰던 라틴 아메티카 대륙에서 오늘 복음 말씀이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난 다음에도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권력 상층부의 정치가들과 군인들이 식민모국이었던 스페인에게서 배운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며 있지도 않은 공산화 위협을 들먹이며 군사독재정치로 민중을 억압했습니다. 이때 민중의 저항이 일어났는데, 이 저항을 무력화시키고자 오늘 복음 말씀을 들먹이며 권력자들이 억압하니까 차라리 저항세력에서 복음과 신앙까지 버리려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저항세력의 편에 서서 이들을 대변하면서도 또 극복해낸 인물이 체 게바라입니다. 

 

  그는 독재자들과 이를 비호하는 미국을 향해 총을 들고 혁명전쟁에 참가한 의사였으나, 항상 전투 전에 성경 책을 펴 놓고 말씀 전례로 기도하면서 설교하기를, 혁명군들이 불필요한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고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방신학자들이 오늘의 복음 말씀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보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은 폭력을 단념하라는 형식상의 메시지도 있으나 폭력 구조를 발본색원하라는 더 중요한 내용상의 메시지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존재하는 악한 폭력에는 저항하되 물들지 말아야 한다, 폭력을 당장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피해를 자처해라, 때리면 맞고 빼앗으려 하면 내 주고, 천 걸음을 강요하면 이천 걸음이라도 가 주어라, 그렇게 해서라도 손해는 볼지언정 그들이 기대하듯이 죄에는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는 일종의 방어적인 해학을 보여주신 것인데, 더욱 본격적으로는 아예 새로운 질서로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이 사악한 현세 질서와 구조로부터 회개하여 이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봇의 포도원’이 상징하는 희년법의 이상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늘 있어 왔으며 또 그 간격이 점점 좁혀져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이상은 오늘의 현실이 되고 오늘의 이상은 또 내일의 현실이 되는 흐름이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토지의 정의에 있어서나, 폭력의 추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문제 많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진보시켜서 이상에로 나아가려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고, 교회는 이 이상을 가능한 대로 현실화시키려는 역사적 실험의 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