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수성구 2022. 5. 28. 04:45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사도 18,23-28; 요한 16,23-28 / 2022.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의 말씀에서 묵상해야 할 화두는 복음에서는 기도요, 독서에서는 지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네 신앙 현실의 경험과 다소 아니 어쩌면 한참 동떨어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해 오고 있지만 기도하는 것마다 들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기도가 그분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기도해야 당신 귀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삶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시 알아들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6,8).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여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삶에서 우러나왔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삶에서 기도와 동떨어진 채 간절한 마음도 없이 입으로만 기도하는 수가 많은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 이해와 우리의 기도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진정성이요 실천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부터 청하되(마태 6,33), 기도하고 나서는 그 기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24).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기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을 정리해 놓은 인식 체계가 성경이나 교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는 세상 지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는 힘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으로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영적인 지식은 자기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동업자이자 동료 선교사가 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가 아폴로라는 설교가를 만나서 한 수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평신도 부부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도 정통하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까지도 정확히 가르쳤던 직업적인 설교가를 가르쳐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 부부는 바오로로부터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에 관한 초대교회의 체험과 전승을 전수받을 수 있었지만, 아폴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약종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는데, 그는 강학회에서 교리에 통달했던 이벽으로부터 직접 천주교 교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와 한역서학서들을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마재 교우촌에서 사귄 황일광 시몬이라는 천민 출신의 교우로부터 민중 언어는 물론 그에 담긴 민중의 심성 속에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 신관을 배워서 이 교리를 담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신화되어 버린 민간 무속에 대하여 영적인 식별을 정확히 해 냈으므로, 교우촌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한 후에 교리서 저술을 맡겨서 ‘주교요지’가 쓰여지게 되었는데, 평신도로서 정약종이 쓴 이 책이, 프랑스 선교사 마이야(馮秉正, Joseph Marie Anne de Moyriac de Mailla)가 지은 ‘성세추요(聖世蒭蕘, 대중교리서, 1733)’라는 한역교리서보다 낫다고 주 신부도 평한 바 있습니다. 

 

  박해가 종식된 직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1859-1915) 신부는 호남 지방의 교우촌들을 둘러보고 나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이런 보고서를 써 보냈습니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주교요지’를 통해 얻어진 교리 지식을 실천한 결과가 이렇듯 놀라웠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에게는 대부(代父)와 대모(代母)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지니고 있던 교리 지식의 실상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세상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살았던 영적인 지식이었으며, 공동생활 양식을 실천한 인간관계의 지혜였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삶과 마음으로 바치는 진실한 기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