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포도나무의 비유가 주는 역사적 교훈

수성구 2022. 5. 18. 06:00

포도나무의 비유가 주는 역사적 교훈

 

사도 15,1-6; 요한 15,1-6 / 2022.5.18.;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사도들의 사명을 겨냥하여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농부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하면 풍성한 선교적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내쳐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빈약한 성과를 내거나 또는 헛수고를 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 초대교회는 내부에서 발생한 첫 시련을 맞고 있습니다. 바로,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선교활동에서 비롯된, 이방인 입교자에게 할례를 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면제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첫 사도회의를 열었으니,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을 식별하여 대처해야 했던 첫 공의회였습니다. 자칫하면 초대교회가 내부 갈등으로 말미암아 분열될 수도 있었던 중대한 위기에서 사도들의 식별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말씀의 초점은 정체성과 식별의 문제입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에 걸쳐 소개해 드린 ‘고조선 문명’ 연구 성과는 실로 우리 역사학계의 오랜 숙원을 해결한 쾌거였고 국제학술계에도 이미 보고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기록해 놓은 기존의 문헌들은 중국측과 일본측이 힘을 가지고 있던 당시에 모조리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고 조작해 놓았기 때문에, 신용하 교수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이들 문헌에 의존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등 서구 학계의 연구성과 특히 고고학, 문화인류학, 기상학 등의 통섭적인 연구성과를 기본 자료로 삼고 또한 컴퓨터의 발달로 방대한 자료를 통계 처리할 수 있게 된 21세기의 흐름에 맞추어 한반도와 만주 등지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을 객관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이런 엄청난 연구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문헌은 조작 가능하지만, 유적과 유물은 조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증사관’의 명분으로 포장하여 기존 왜곡된 문헌 사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온 기성 사학계가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 덕분입니다. 

 

  그런데 민족적 자부심을 한껏 드높일 만한 이 고조선 문명에 대한 연구에서도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자생했으며, 신앙과 종교가 자연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적과 유물 등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이차럼 종교와 신앙 그리고 문화와 언어 등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요 한계입니다.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는 신관은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 풍조에서 보듯이 인간 관념의 투사(投射)일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에로 지향되기는커녕 그저 인간이 지닌 능력을 과시하다가 자멸할 뿐이고, 하느님 신앙은 하느님께로부터 먼저 주어진 선한 인격적 체험을 계시받아서만 수용되고 전파된다는 것이 가톨릭 신학 신론(神論)의 상식이며, 이것이 사랑의 진리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부합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첫 역사에 드리운 문화, 즉 제천의식(祭天儀式) 요소라든지 여기서 유래된 천손의식(天孫意識)이 홍익인간의 정신이나 평화 실현의 의지로 나타난 면모만 보더라도, 계시된 신관을 수용하기는 했으나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편협하고 국수적인 면모를 고수함으로써 자멸(自滅)했던 히브리 문명과는 분명히 달라서 더 보편적이고 개방적입니다.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민족의 기원 문제와, 또 이 기원에 깃든 신성을 알아보느냐 혹은 우리 민족의 종교와 신앙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치부하고 마느냐 하는 신성의 식별 문제는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에 담긴 역사적 교훈에 따라서, 과연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가 뜻한 바 풍성한 열매를 문화적으로나 선교적으로 맺을 수 있느냐의 성패가 이 정체성 식별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화사관(慕華史觀)과 식민사관에 물들었다는 혐의를 짙게 받고 있는 강단사학계는 물론 이들과 학문적으로 논쟁적인 대척점에서 한민족의 선진성과 우수성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재야사학계와, 그리고 이 두 진영과는 독립된 입장에서 고조선 문명론을 주창한 신용하 교수 등이 이룩한 학문적 업적이 모두 무신론적인 학문 풍토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 민족 역사에 깃든 신성을 추적하는 일이나 또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별 작업은 신학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져 있는 신학 토착화의 과제입니다. 이는 서구에서 들어온 까닭에 서양 종교라는 선입견이 다분한 그리스도 신앙을 한국인의 정서와 사색으로 해석해 내야 하는 신앙 토착화의 과제와 함께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 확립의 과제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진 현상과 사태, 즉 신앙 진리의 자발적 수용, 성사적 갈망에서 이루어진 놀랄만한 선교 성과, 박해에 맞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자 전국에 교우촌이 세워진 현상, 치명의 용기를 불사한 만여 명의 순교자들의 존재와 이 과정에서 갈수록 늘어났던 입교자들의 존재 등에 담긴 역사적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합니다. 

이 한국 초대교회의 자생적 발생 현상과 백년 박해 속에서 지속된 순교 사태는, 가톨릭교회의 2천년 역사 안에서도 전무후무한 이례적 현상이거니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 안에서도 역시 전무후무한 이례적 사태였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편 초대교회 시절에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공동생활 양식을 제국내 영토 곳곳에 전파하여 끝내 로마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시키긴, 성령의 사기지은 효과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지, 또 우리 가지의 뿌리는 과연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인지를 식별하는 역량에 따라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