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이끄심으로 회복하는 복음의 사회적 매력
사도 15,22-31; 요한 15,12-17 / 2022.5.20.;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의 기쁨이 가져다주는 힘은 사회적 매력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사도들을 움직였던 힘 역시 복음의 기쁨이었으므로 초대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매력을 한껏 발산하여 로마의 복음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방인 입교자 할례 논쟁이 생겨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닥친 이 내부 갈등을 사도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 끝에 공동합의로 가까스로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 출신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에 따라 선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더 이상 낡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게끔 선교의 고속도로가 닦인 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회적 매력을 되찾은 초대교회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힘으로 로마제국 내에서 교세를 키워나가서 마침내 이 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에도 아주 커다란 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가성직자단 해체와 조상제사 금지령으로 초래된 박해였습니다. 한국교회를 창립한 주역인 이벽은, 강학회 선비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한 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1784년) 가장 먼저 세례를 받고 주도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세례 성사를 베풀었는데 불과 한 해 사이에 한양 선비 천여 명이 입교하는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들은 문중에서 그에게 박해를 가하여 자택에 감금하고 일체의 음식과 물을 주지 않는 바람에 죽게 만들었습니다(1785년).
그러자 이벽의 사후 대책을 논의한 강학회 출신 선비 신자들은 이승훈을 중심으로 열 명으로 지도부를 결성하고 교리 교육과 성사 거행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지방 출신들 가운데에서도 덕망이 높은 선비들을 골라 입교시켰고, 입교 대상을 중인과 양인, 천민들과 부녀자들에게까지도 넓혔으며, 한문을 모르던 백성이나 부녀자들에게는 이벽의 부인이 한글로 번역해 놓은 ‘천주실의’, ‘성교요지’나, 원래 한글로 쓰여진 ‘주교요지’, ‘천주공경가’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입교자들이 모든 신분이 망라되었는가 하면 한양 이남 지방 곳곳에 퍼져서 불과 5년 사이에 4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유항검 등 일부 선비가 교리 책을 읽다가, 서품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사를 거행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자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인편으로 질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답변이 날벼락이었습니다. 성직자를 보내줄테니 교리교육과 성사 거행을 했던 평신도 조직은 즉시 해체하라고 지시하고,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로 판명나서 교황청에서 금지(베네딕토 14세, ‘Ex quo singulari’, 1742년)하고 있다고 통보하였던 것입니다(1790년).
이에 실망하여 입교했던 선비들 대다수가 교회를 떠났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천주교식으로 상을 치루라고 유언한 모친의 당부에 따라서 신주 없이 죽은 부모를 위한 기도예식으로 상장례를 치루었다가(진산사건) 참수형을 받았습니다(신해박해, 1791년). 하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한 북경 주교와 교황청의 결정에 반발하여 배교했어도 유배형을 받았습니다(신유박해, 1801년).
‘가성직자단 해체’와 특히 ‘조상제사금지령’은 “조선의 모든 계층의 눈을 찌른 것”(샤를르 달레)으로서, 이 조치들 이전에 놀라웠던 선교 성과를 감안하면 교황청에서 조선 사회의 복음화를 포기한 조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지도자급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한 가운데에서도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전국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세워 신앙생활을 계속했으며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를 지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그후 ‘중국 의례 훈령’으로 조상제사는 다시 허용되었고(1939년) 진산사건의 주역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순교 복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2014년).
평신도 출신인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하며 세례를 주었고, 이에 대해 당시 초대교회 사도단에서 당사자들의 소명을 들어서 이방인 할례 논쟁을 벌인 끝에 공동합의로 원만하게 마무리짓고 로마의 복음화로까지 나아갔던 것을 감안해 보면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에 겪은 내부 갈등은 이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이제라도 깔끔하게 해소해야 합니다. 즉, 자발적으로 성사에 대한 갈망을 느껴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준 일은 ‘독성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와 사도직 활성화라는 공의회의 결정을 2백년이나 앞당겨 실천한 모범 사례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물며 백년의 박해를 자초한 조상제사 금지령은 교황청의 훈령으로 이미 취소되었는데도, 이로 인해 배교자가 되어야 했던 정약전과 정약용의 명예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상제사 금지령에 반발했을 뿐, 유배지에서 십수 년 동안 복음적 가치에 따라 저술활동에 종사하였고, 그 저작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신앙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활성화시키고, 조상을 공경하여 드리는 제사 등 아시아적 윤리 가치를 존중하는 이 두 가지 현안 문제를 복음의 기쁨이 가져다주는 개방적 안목으로 잘 풀어서 사회적 매력을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아시아의 복음화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백합 > 오늘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 (0) | 2022.05.20 |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5.20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5.19 |
포도나무의 비유가 주는 역사적 교훈 (0) | 2022.05.18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