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수성구 2022. 5. 17. 06:0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사도 14,19-28; 요한 14,27-31 / 2022.5.17.;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으로 심하게 겪은 박해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 선포의 뜻을 접지 않았음은 물론, 가사(假死)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내용은 복음 선포를 멈추지 말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정도의 환난은 겪어야 마땅한 것이니,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신자들을 오히려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처신과 태도에서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본 티모테오는 감동한 나머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참조: 2티모 3,11).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의 결실로서 하느님의 평화를 세상에 남기시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짊어지신 십자가와 그로 인한 부활의 은총으로 성취한 하느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도 이끄신 성령께서는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문화 속에 이 진정성과 평화의식을 집어 넣으셨습니다. 속죄와 감사의 지향에서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몸과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구도적 정신 전통이 생겨났다면, 경천의 지향에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문명의 도구로서 천문 관측과 역법, 농경 질서와 수리 철학과 존대어법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낮에는 비온 뒤에 하늘과 땅에 걸쳐 세워지는 무지개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별자리의 이동 경로를 관측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알아들어 문명의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 넣거나 각종 역사 일지에 기록하여 남겼으며,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궤도가 서로 다른 태양계의 별들이 일렬로 늘어 선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라든지 작은 달이 커다란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 현상은 커다란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서 반드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문관측활동에서 알아낸 지식에 기초하여 해의 공전주기로 일년을 삼고, 달의 공전 주기로 한달로 삼으며, 해의 자전 주기로 하루로 삼았으며, 역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 농업 문명이 이로써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천문 관측 활동은 땅의 질서를 이끄시려고 하느님께서 하늘에 보여주시는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부산물로 천문 현상에 대한 사색과 이를 수로 표현하는 수리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뜻에서 하나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기본 질서에서 을 이끌어 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을 삼았고, 동서남북의 방위에서 을 보았으며, 땅에 있는 물질 중에 불(火)과 물(水)과 나무(木)와 쇠(金)와 흙(土) 등이 기본이라고 보아 다섯을 착안했습니다. 천지(天地)와 음양(陰陽), 천지인(天地人),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본 물질이 모두 하나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성찰한 사색이 이 십진법의 수리 철학에 담겨 있습니다(天符經). 

 

  이 기본 수에서, 천지의 둘과 사방의 넷을 합해 여섯을 만들고, 음양의 둘과 기본 물질 다섯 가지를 합해 일곱을 만들었으며, 네 가지 방위를 다시 세분하여 여덟을 만들었고, 땅의 사방과 다섯 물질을 합한 땅의 완전수로서 아홉을 만들고, 땅의 다섯 물질에 상응하는 하늘의 다섯 별 즉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의 궤도를 오행(五行)이라 하고는 다섯에 다섯을 더한 을 하늘의 완전수로 삼았으니, 이로써 인류 문명의 십진법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받드는 경천의식으로부터 부모와 윗사람을 공경하는 효(孝)의 도리가 나왔는데, 문명의 역사를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도 고조선 문명의 효 사상에 대해서 듣고는 인류를 구원할 사상이라며 경탄했던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천과 효 사상이 반영되어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었으며, 그 결과로 전 세계 모든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특히 ‘말씀’, ‘우리’와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서만 통용되는 경천의 낱말들입니다. 

 

  이렇듯,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요소들이 모인 결실이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정신 수양의 구도적 전통과, 이를 위해 문명의 질서를 수립하는 평화로 나타났습니다.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지향으로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는 흰 옷을 입었습니다. 이 전통에서 우리 민족은 흰 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제의 직책을 받은 민족이 즐겨 입어온 흰색은 빛이 비추어오는 밝음의 색으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동시에 그분이 주시는 평화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강성해진 주변 민족들이  숱하게 침략을 해 왔어도 단 한 번도 다른 국가를 침략하거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시대 이래 중국의 힘에 밀려 사대했던 천5백년 동안이나 일본의 힘에 밀려 식민통치를 받던 36년간에도 하느님께 대한 진정성과 평화에 대한 정밀하고 고유한 문화 덕분에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 나라의 문화와 국력을 추월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앞장서 실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민족은 분단 구도를 극복하여 평화를 되찾고 인류 전체에게 평화를 나누어주는 평화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세계 제44차 성체대회, 1989년)하고 격려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강론 말씀은 예언자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했던 구도적 정신 전통, 정밀한 문화로 이룩한 평화의 문명, 그리고 이를 알아보는 외부의 진지한 시선 등 이 모든 역사적 징표에서도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게 하신 성령의 이끄심이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