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부활 제4주일] 부르심에 관하여

수성구 2022. 5. 8. 04:49

[부활 제4주일] 부르심에 관하여

부르심에 관하여

사도 11,1-18; 묵시 7,9-17; 요한 10,27-30 

2022.5.8.; 부활 제4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 맞이하는 부활 제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날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면서 그 부르심에 응답한 성소자들을 기억하고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에 응답하도록 기도합니다. 머지않아 가시화될 북방 선교도 준비해야 하고 하느님의 가치를 위해 헌신할 일꾼도 길러야 하는데, 그러자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성소자를 배출할 가정들이 나와야 합니다. 

 

2.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수행한 선교여행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성소자로서 늦깎이였던 바오로는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지 14년이 지나서야(갈라 2,1)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책임자였던 바르나바의 신원 보증으로 비로소 사도단에 합류할 수 있었고(사도 11,25-26), 그 후에는 그가 지닌 특유의 열성 덕분으로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추천을 받아 선교사로까지 뽑혔습니다(사도 13,1-3). 바오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 선발된 주류가 아니었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뽑혀서 어렵사리 사도단에 합류한 비주류였으므로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고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갈라 2,7; 로마 15,20). 

 

3. 그렇지만 사실 그는 소아시아에서도 킬리키아의 국제 도시로 유명했던 ‘타르수스’ 태생이어서(사도 21,39) 당연히 당시의 국제 공용어였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부유했던 부모 덕분에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선택은 그에게는 차라리 더 익숙한 길일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토종 사도들에게는 이런 국제적인 안목이 없었으므로 선교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런 사정 덕분에 그는 기성 사도 출신 선교사들의 한계를 뛰어 넘어 로마 제국의 영토 깊숙한 곳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는 나중에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는 본격적인 선교의 행보를 펼쳐보였습니다. 

 

4. 하지만 1차 선교여행 도중 이탈한 마르코 때문에 일어난 불화로 바르나바와도 헤어져 독자적으로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 2차 선교여행부터 그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부터 찾아가곤 했습니다. 즉, 가는 곳마다 안식일이 되기를 기다려 유다인들이 사는 디아스포라의 회당부터 찾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선교 지향에 있어서도 협조자는 동족 가운데에서 구하려던 동기가 아니었나 하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제 발로 떨어져 나간 마르코와 그 때문에 갈라선 바르나바를 대신해 줄 협조자를 구하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말년에 그가 회고하는 협조자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에는 대단히 많은 인맥이 소개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유다인 출신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보아도 이런 추정이 뒷받침됩니다(로마 16장). 

 

5. 과연 그는 오늘 독서의 내용에 나오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던 유다인 회당에서 행한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서 그리스식 사유와 다신교 풍습 속에 물든 채로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살던 재외 유다인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손바닥 보듯이 훑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기준으로 재해석해 냄으로써 그들이 잊어버린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소환해 내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이시며 유다인들은 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고 만방에 전할 사명을 지닌 민족임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유다인들이 고수했던 편협한 선민의식을 한참 뛰어넘은 역사의식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참 이스라엘이요 유다인 자신들은 옛 이스라엘이라고 뒤웅박 취급당한 억하심정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바오로의 소명의식은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는 자부심과 역사성에 기반한 유다인들의 역사에 대한 정통 인식과, 유다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보편적인 선교 소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6. 장차 향후에 북녘 동포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민족 복음화 과업이 진척되고 나면, 남북 겨레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힘을 합쳐 아시아 대륙에 복음을 전하러 개척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때, 조선족이나 고려인을 포함하여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중요성이 부각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또 같은 이유로, 현재 우리 나라에 들어와 일하는 아시아 각국 출신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역시 아시아 복음화의 중요한 고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전략을 눈 여겨 보고 응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앞으로 성소의 다양성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과 흔적에 대한 역사의식과 함께 홍익인간의 정신에서도 나타난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선교의식도 요청될 것이 자명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성소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지금 성소자의 길이 본당사목 일변도여서 너무나도 획일적이거나 좁은 편인데, 바오로 같은 새로운 성소자를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펼쳐질 북방선교의 청사진이 기대됩니다. 

 

6. 나자렛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순종하시며 여느 유다인 어린이·청소년들이 그렇듯이 모든 것을 부모에게서 배우셨습니다. 기도와 율법과 성경, 그리고 목수 일은 물론 집안 살림살이와 세상 돌아가는 사정까지. 그러다가 열두 살이 될 무렵, 인성으로서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배우던 시절에서 신성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셨습니다(루카 2,41-52).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내면에 나타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놀라고 당황스러웠겠지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의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소년 예수님으로서는 그러는 부모의 반응이 또한 생뚱맞았던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대꾸했다고 루카가 전해주었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7. 그 이후에 요셉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청년으로 장성해 가는 아들 예수님과 홀몸이 되신 어머니 마리아는 서로 간에 대화할 시간이 많았을 것이고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과 기도를 많이 대화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른 살이 되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떠나 복음선포 활동에 나서게 되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반대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소를 느낀 자녀들에게 어머니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또 자녀에게 성소를 느끼게 하고 싶은 어머니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제들 역시 성소자를 발굴하고 싶다면 어린이들과 청소년 신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과정도 필요하거니와 어머니인 여성 신자들이 하느님의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목하는 일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가정 성화야말로 성소 계발의 첫걸음입니다. 

 

8. 성소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의 일꾼이 넘쳐나는 그런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는 수확해야 할 작물이 늘 많이 있지만 정작 이를 수확할 일꾼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성소란 으레 만성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 아시아의 여러 나라 교회들 사정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소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성소의 씨가 말랐다고 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래서 그들 교회에 파견되어서 성소자를 발굴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박해시대에 치명할 각오를 하고 조선에 파견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역시 방인 사제 양성이 최우선의 과제였고, 그래서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가 배출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9.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간절한 청원이 있을 경우에,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서는 바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33).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덤으로 얻어지리라는 힌트도 일러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필요한 성소자를 원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상기하고 실천하면 될 일입니다. 이미 열두 사도를 부르셨던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로 설치던 바오로를 돌려세워 당신의 원대한 복음화 계획을 실현할 일꾼으로 쓰셨습니다(사도 9,1-22). 실제로 바오로가 수행한 선교활동은 특별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그 넓은 영토를 다니면서 20여 년 동안 곳곳에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의 복음적 활력을 퍼뜨렸습니다. 이 활력으로 250여 년에 걸친 로마제국의 박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서구 세계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10. 하느님께서 이제는 동방 세계를 복음화시킬 때입니다.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오랜 격언이 드디어 현실화되어야 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화의 빛을 비추어야 할 주역은 동방에서도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동쪽에 자리잡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일찍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복음 진리의 빛을 자생적으로 들여와서 온 겨레에게 비춘 교회가 자랑스럽게도 우리 한국교회입니다. 이제 그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아시아와 북방 대륙의 복음화를 위한 성소자들이 나타나도록, 그 길의 선각자이신 신앙 선조들과 그 길에 동행하며 목숨바쳐 신앙을 증거하신 순교 선조들께 전구를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