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5. 8. 04:23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4주일: 다해

 

오늘은 성소 주일이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미사가 되도록 하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기리는 착한 목자의 주일을 맞아 또한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복음: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를 입증해 보여 달라고 한다(요한 1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탓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10,25-26 참조). 이 유다인들의 요구는 진실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업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 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양 떼에 속하고 속하지 못하고는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집이나 판단을 주님께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데 달려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주님 앞에 단일한 양 떼를 이루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따르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양 떼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도 그것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는 말씀에서 기쁨과 평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악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루의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진실한 양 떼가 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일한 신앙, 단일한 사랑, 단일한 행동, 일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삼위일체의 모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들 상호간에 주님과 깊은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래서 그들이 그분을 따른다(27절)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목자는 권력이나 힘을 가지신 분의 모습보다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묵시록에서는 살해된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7). 이 어린양이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 양 떼를 보호할 힘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요한 10,11)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과 봉사를 베푸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양 떼를 다스리는 목자가 되신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 이것이 살해당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렇게 해서 그분은 당신 양 떼의 목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모습은 세상에 목자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교의 지름길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전교의 성공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사도 13,49)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을 거슬러 주어진 박해를 당하여 이코니온으로 갔을 때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만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에게로 항상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