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성구 2022. 5. 7. 01:47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9,31-42; 요한 6,60-69 / 2022.5.7.;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의 결론으로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과 이로 말미암은 군중의 반응과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다 지방은 물론 갈릴래아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 등 당시 이스라엘의 전 지역에서 늘어나 퍼져나가는 선교적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 무렵에 사도 베드로가 중풍에 걸려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일으켜 세우고, 병 들어 죽은 타비타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표징을 증언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에서 제6장과 제7장은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로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는 특별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명백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성체성사의 배경이요 예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음식이며 음료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부활의 영광으로 거룩하게 변화된 기반 위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메시아 백성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라는 요청과 목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 요청과 목표는 영적인 부담으로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주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이 축성되고 거룩하게 변화되며 신자들에게 나뉘어지는 성찬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일상의 성사적 발현이며 재림인가 하면, 성령의 강림입니다. 

 

  그런데 성체성사에 담겨 있는 이러한 의미와 은총을 알아보지 못하는 신자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빵의 기적을 목격하고 직접 배불리 먹은 군중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할 정도로 그분께 열광을 하다가도, 육신을 배불리 먹이는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것이 장차 당신의 살과 피로 내어주실 것임을 암시하시자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담긴 뜻과 신비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알아듣고자 할 의지도 없었던 자들은 모두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들 뱃속과 잇속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물음은 제자들의 거취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갈테면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군중들에게는 여러 가지 비유로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는 경우에도 제자들에게만은 자상하게 풀이를 해 주시던 예수님께서 이 순간만은 매서울 정도로 까칠하게 굴으셨습니다. 그만큼 최후의 만찬을 염두에 두시고 또 당신 생애를 이어줄 제자들이니만치 야무진 답변을 받아내시려고 작정하신 듯한 눈치였습니다. 사실 당신의 신원과 직결된 이 문제, 즉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여기는지의 여부는 믿든지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이 분위기를 풀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요한 6,68). 그랬던 베드로이기에 사도가 된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병든 애네아스를 고치고 죽은 타비타를 살리는 기적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이 신적 권능으로 도와주신다는 믿음과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자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이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등지에서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해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놀라운 선교 성과는 이런 경위로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가 겪었던 풍어기적과. 마법의 숫자 153의 현실적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얼마마한 믿음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밀도는 순도 100%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믿음이 순도 100%의 섬김이요 순종이었듯이, 제자들도 예수님께나 서로간에 순도 100%의 믿음과 섬김이 요구됩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서로간에 순도 100%로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기적적인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마치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을 씻겨 주셨고 제자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그분은 적대자들에게 마치 중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욕과 매질을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어도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참아 받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의 구원, 우리의 구원, 세상의 구원은 이러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