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수성구 2022. 5. 3. 05:39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1코린 15,1-8; 요한 14,6-14 / 2022.5.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기우 신부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인물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에 속했고,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필립보는 베싸이다 출신으로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파국이 임박했던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가 요한의 추천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하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 오신 분임을 알아보았는데,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며(요한 1,40,43), 그분이 메시아임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세례운동의 동지였던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천거하였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 다른 친척 형제들이 인간적인 선입견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던 반면에 야고보는 그분의 신성을 믿고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의 첫 주교로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던 첫 사도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며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 면제 결정을 이끌어내어 이방인 선교의 물꼬를 튼 인물입니다(사도 15,13).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사도 요한의 형이었던 야고보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작은 야고보, 후자를 큰 야고보로 구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앞두시고 세족례와 성찬례를 세우신 다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고 말씀하시자,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6-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덧붙여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1-14)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 시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일생을 바쳐 투신하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안목과 열정이 뛰어났던 두 사람이지만, 그분이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 정작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기 이전에도 이미 신성을 발휘하고 계셨고, 우리에게도 그 신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세족례와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족례의 정신에 따라 다른 이들을 섬기기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며, 또 그 대상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인 경우도 많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을 만나뵙지는 못합니다. 경험과 인식 그리고 믿음과 깨달음의 분리 현상이 필립보와 야고보에서처럼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성찬례가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성사의 성변화를 알고 또 믿고 있지만 영성체를 하면서도 이로써 우리가 주님의 몸이 되었으며 그분과 일치되어 살아갈 기운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깨달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 가운데 주일미사를 나오지 않는, 이른바 냉담자의 비율이 80%를 넘는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시절에도 신성이 진하게 배어있는 말씀으로 군중을 가르치셨고, 더군다나 신성에서 나온 권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들을 숱하게 일으키셨는데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를 말씀하셔야 했던 사정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아들을 귀나 알아볼 눈이 없으면 하느님이 눈앞에 나타나셔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육신으로는 하늘이 낸 공기로 숨을 쉬고 땅이 낸 양식으로 힘을 얻으며 살아가지만, 영혼으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과 당신의 몸과 피로 내어주신 성체와 성혈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숨 쉬는 공기와 힘을 주는 양식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듯이, 우리가 추구하고 또 기대며 살아가는 온갖 의미와 진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데도 이에 대해서도 무심하게 살아가는 신자들 또한 부지기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물질문명의 현실에 있어서도 선도하는 사람의 비율은 0.1%, 이를 알아보고 그에 동참하여 시대의 선구자가 되는 사람들의 비율은 0.9%라고 합니다. 도합 이 1%가 인류 역사의 물질문명을 이제껏 이끌어 왔습니다.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릴 뿐이었지요. 정신문화의 현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