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사순 제5주일] 메마른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어라

수성구 2022. 4. 3. 06:08

[사순 제5주일] 메마른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어라

 

"메마른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어라"

이사 43,16-21; 필리 3,8-14; 요한 8,1-11

2022.4.3.; 사순 제5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때입니다. 다음 주일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에는 부활대축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죄와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공통적인 본성은 힘과 이익을 좇다가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죄의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수많은 문명을 일으키고 스러졌다가 다시 일으켰지만 그 안에 공통된 특징 역시 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 죄 때문에 힘 없는 이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러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2.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모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노아 시절에 하느님께서 당시 인류가 저지르는 죄에 노하셔서 일으키신 대홍수에 대한 기억입니다. 대홍수로 인해 지구에는 커다란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산이란 산이 죄다 물에 잠겼고, 그러다가 물이 빠지면서 바다 가운데 있던 땅에 강이 흘러 물길이 났습니다. 엄청나게 거센 물이 급하게 빠져 나오면서 땅을 침식하여 커다란 협곡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의 커다란 강들과 호수 그리고 대협곡들은 이때 조성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상들이 대대로 전해준 전승을 떠올려 전해준 이사야는 대홍수로 말미암은 격변만이 아니라 그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타일러주었습니다. 다음 말씀이 그 뜻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19). 훗날 세례자 요한이 이사야의 이 말을 받아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이 오실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3. 과연 요한이 곧게 낸 그 길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오셨고, 뒤늦게 이를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 그가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바리사이즘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택한 것은 율법에서 인정받는 의로움이 쓰레기인 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정받는 의로움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시고 천국의 길을 여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처럼 부활의 힘으로 죄를 없애는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직 그 길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아니지만,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고 가야할 길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는 필리피 교우들에게도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자기를 본보기로 삼아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권고하였습니다. 

 

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을 심판하시고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계시던 예수님께 다짜고짜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세워놓고 재판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무례하게 굴던 그들의 속셈은 그 여자의 죄를 빌미로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던 것이었습니다. 유죄로 판결하면 평소에 가르치시던 자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동네방네 모함하고 다닐 것이 뻔했고, 반대로 무죄라고 판결하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며 고소할 태세였습니다. 

 

5.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사이 유다인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자신들의 율법대로 재판하면 될 일이었고 굳이 예수님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그 죄가 간음행위로 인한 죄라면 상대 남자도 함께 데려와야 했는데 그들은 여자만 데리고 와서 재판을 강요했습니다. 재판의 최소 형식요건에도 맞지 않게 억지로 재판을 강요하고 있는 이 행위 자체가 죄였습니다. 평소에도 힘 없는 사람들을 율법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낙인찍던 그들이었는지라, 그들은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이 심증만으로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는 동선을 미리 파악해 놓은 듯이 그분께서 백성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맞추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네들이 짜고 치는 놀음에서 죄의 악취가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다가 졸지에 재판을 방청하게 된 백성은, 이미 손에  돌을 들고 여차하면 여자에게 던질 기세로 그분을 다그치던 바리사이파 유다인들보다도, 터무니 없는 재판을 느닷없이 강요당하신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 지가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연자약하게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분이 피우시는 딴청에 조바심이 난 바리사이들이 재촉하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한 말씀 던지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7.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이때쯤이면 지켜보던 방청 백성도 과연 누가 죄인인지 상황이 파악되었을 듯합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자 백성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나 할 것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떴습니다. 어렵사리 뱉으신 이 말씀 한 마디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선고였습니다. 그 말씀을 뒤집으면 죄 있는 자들은 너희들이고, 너희들이야말로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자리를 떴다는 기록도 재미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죄가 많을 수도 있겠고, 나이가 많으면 많던 적던 지은 죄에 대한 성찰도 깊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고백은 죄에 비례하지 않고 성찰에 비례합니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사람, 그것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사람이 더 뉘우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도 죄 많은 순서대로가 아니라 뉘우치는 순서대로 받습니다. 

 

8. 여인에게 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예수님께서는 관심이 없으셨던 듯합니다. 그저 힘이 약해서 끌려온 그 여인이 안쓰러우셨고, 발언권도 없고 변호받을 권리도 없었던 그 여인이 불쌍해서 그 여인의 편에 섰을 터입니다. 다들 가 버리고 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한 눈에 척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구태여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은 그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자기를 변호할 기회조차도 빼앗긴 그 여인이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상황을 설명하라고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ㄱ)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ㄴ) 하고 말씀하시고 상황을 마무리하셨습니다.

 

9. 하느님께로부터 심판자의 역할을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지목된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보여주는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또한 문명은 생활을 물질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지만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기회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나눔이 없는 채로 세대가 대물림되면 빈부양극화는 갈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도 늘어납니다. 사람이 죄인이고 문명이 죄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명을 이룩한 역사 역시 죄스런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오셔서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대책을 발표하셨으니,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10.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대감염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이 여인처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숨도 못 쉬고 움츠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떳떳하게 차지하지 못하고 눈치 보아 가며 일하던 여러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고통을 참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방역에 성공한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재난은 평등하지 않았고 약자에게 더 가혹했습니다. 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해 왔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생계 유지 방편조차 잃어버릴 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1. 그 약자들이란 자영업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과 돌봄을 제공했던 방과후 교사들, 여행멈춤의 시대에 여행과 관련된 일로 생업을 유지하던 이들이나 관광통역안내사들, 그리고 식당 노동자들, 재난지원금을 받을 꿈도 꾸지 못하는 임시체류 이주노동자들, 장기간 공연 방학으로 무대를 빼앗긴 공연예술 노동자들, 그리고 겹치기로 일하던 각종 알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12. 무작정 끌려와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여인에게 물어봐 주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주신 예수님처럼, 집단감염의 대재앙 시대에 불평등한 노동현실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나 상시적 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에게 자비로운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소리 없이 세상의 죄가 쌓이는 동안에 힘 없는 약자들이 죄로 인해 입는 상처와 당하는 피해도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욕심의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