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사순 제5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4. 3. 06:03

사순 제5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순 제5주일 : 다해

 

오늘의 전례 역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9). 하느님의 ‘새로운’ 개입을 말씀하신다. 이 새로운 것은 이중적 차원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재생적 차원으로 지나간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다시 제시되는 구원의 선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한결같이 충실하심에 대한 성사적 표징이 된다. 둘째로는 ‘창조적 차원’인데, 하느님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으시고 창조적 능력으로써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것 안에서는 과거가 재현되고 또한 미래가 예견된다.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어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구원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하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아직 묵은 나로부터 진정한 대탈출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로 변화되어야 한다.

 

복음: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소식’을 계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식은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를 단죄하기를 바랐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단지 차이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공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데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시라는 것이다(참조: 콜로 1,15).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3절)를 데리고 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세 법(레위 20,10; 신명 22,22)에 의하면 그 죄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심판은 단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요구가 순수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6절). 만일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고발할 수 있을 것이고, 단죄할 때는 죄인들의 친구로 지낸 예수님께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한 심판보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심판을 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신다. 두 번이나 땅에 ‘쓰시는’(6.8절) 행동은 간교한 속셈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법조문 자체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법의 근본정신을 읽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간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때였다(9절). 물론 그들은 간음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 이웃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그러기에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을 해방해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0-11절). 예수님의 용서는 낭비적인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생명을 위한 심판으로써 단죄와 죽음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르다. 특히 용서와 사랑의 심판인 파스카를 맞이할 우리는 남을 단죄하거나 서로를 단죄하는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의 체험이다. 하여간 그는 비록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을 계속 달려간다. 또한 더욱 빨리 달려가기 위해 ‘대탈출’의 진정한 자세로써 겉꾸미는 과거의 모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그분의 부활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필립 3,10-11).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새로운 것’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사순절은 우리가 바로 그 신비를 재발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영역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기에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립 3,9). 이러한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어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