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다니 9,4-10; 루카 6,36-38 / 2022.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와 심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분이시지만 그 심판의 잣대는 자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야 하며 그 자비의 잣대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심판하거나 더구나 단죄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심판주이시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게다가 한없이 당신의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조성하시고 생명을 지어내시되 이를 조건없이 먼저 행하셨으며 그것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자비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계기는 우리에게 당신을 닮으신 구세주를 보내주신 강생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의 조건에서 그리고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회악 조건에서 당신께서 창조하실 때 섭리하신 길을 가는 방식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요약한 교리 용어가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는 강생으로 시작되어 부활로 완성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양식으로 현존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부활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이 강생과 부활이 한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자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사자굴에 떨어질 절대절명의 위기를 앞두고 하느님께 절절한 심정으로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자기 자신이 살아온 바를 성찰하거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 살아온 바를 성찰하면서 동족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거역하였다는 것이고, 그 거역의 행동은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주변 강대국들처럼 약한 나라를 침략했다는 죄가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동족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지 않았다는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니엘이 기도한 같은 잣대로 삶을 성찰하고 죄를 가려내자면, 세상이 말하는 정의의 잣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라는 잣대로 성찰하고 뉘우쳐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 몫을 차지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세속적인 잣대로 세상살이를 하는 우리 자신들이지만, 적어도 교회 안에서 교우들끼리의 인간관계에서라면 그리고 비록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의로움의 가치를 공유하는 선의의 연대관계에서라도, 하느님의 정의를 잣대로 삼아 함부로 단죄하지 말고 섣불리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성찰해야 할 것은 불의하고 이기적인 세상 풍조 안에서, 세상을 하느님의 뜻과 빛으로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맺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자비로우며 얼마나 정의로왔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는 진복팔단의 말씀이 적중합니다.
- 하느님 나라를 약속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멀리 하지 않았는지,
- 불의한 일에 슬퍼하며 서로 위로했는지,
- 하느님께 온유한 이들끼리 연대하며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 옳은 일에 주저없이 나서 보았는지,
- 자비를 베푸는 일에 용감하고 베풀어진 자비에 감사했는지,
- 이 모든 순간에 기도로써 우리 마음을 하느님 앞에 깨끗하게 정화시켰는지,
- 평화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작은 행동이라도 힘을 보태 주었는지,
- 그리고 이 모든 선행으로 오해와 의심과 비협조로 안팎에서 박해를 받을 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의 덕행과 감사의 마음을 견지할 수 있었는지 하는 여덟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시되, 세상의 악을 늘 의식하시며 맞서 대결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긴장스런 국면에서 그분의 처신은 매우 대조적이었음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 국면에서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또 다른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입니다. 즉, 아주 보잘것없는 이들이라도 귀하게 대해야 하며, 물 한 잔 주는 일 같이 하찮은 일이라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해야 합니다. 이 작은 이들, 이 작은 일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빅 이슈입니다. 먼저, 무상으로 그리고 한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우주를 새로 창조하시는 듯한 정성으로 이 작은 선행을, 작은 이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한편 세상의 악이 판치는 국면에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천하의 권세와 재물과 영예를 줄 것처럼 유혹할지라도 그런 세속적인 것들은 하느님의 말씀 한 조각보다도 못한 쓰레기로 낮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연, 지연 등 갖가지 명목으로 유혹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聖)은 성이고 속(俗)은 속이니까요. 세속적인 것들은 아무리 커 보여도 아무런 흔적없이 결국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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