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을 이긴 변화
창세 15,5-18; 필리 3,17-4,1; 루카 9,28-36
2022.3.13.; 사순 제2주일; 이기우 신부
1.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가 기억한 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라고 세상에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요한 14,6). 그 과정은 하느님을 적대하며 욕망으로 유혹하는 악마와의 대결이었고 이 또한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걸어가려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의 전례에서 기념한 내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의 전례는 이 과정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이 거룩한 변화의 여정은 그 변화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2. 이러한 거룩한 변화는 이미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신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되어 오던 바였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란,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주님이 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바친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펴겠다는 의지의 봉헌이었고, 그에 따른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늘어나리라는 축복과 늘어난 그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주시겠다는 축복이었습니다.
3.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러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실현하고 그 축복을 실현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요 참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양성하신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 당시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의 강역과 그 주변 지역에로 이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4. 그리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간 교회는 시대별로는 물론 지역별로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다인들은 그 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하느님께서 유다인 모세가 전해준 율법과 역시 유다인인 엘리야를 위시한 예언자들이 전해준 예언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신 진리의 계시는 여전히 유효하였기에 각 시대의 교회와 각 지역의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예언을 귀담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 왔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시행착오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을 본받는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면서 세상도 죄악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복음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5. 이 복음화의 여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보여준 언행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타볼 산에 오르시되, 따로 동행하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오래 전 서로 다른 시대에 활약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시대 간격을 뛰어 넘어 소환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후대의 교회들에 의해 계승되는 복음선포 활동 역시 일찍이 모세와 엘리야 시대에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광경을 보고는 아주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오래도록 이 상황에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변화를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의 산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변화를 산에서 내려가 세상에서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바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6).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받으신 세례 때에 들려온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예수님만 들으셨는데, 이제는 세 제자가 함께 들을 수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7.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변화가 그분이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세 제자처럼 교회가 말씀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말씀 전례에 있어서는 물론 복음선포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 안에 늘 현존하여 계십니다. 모세의 시대가 다르고, 엘리야의 시대가 다르며, 또 우리의 시대가 다를지라도,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적 범주일 뿐 하느님의 말씀은 이 범주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8. 또한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재촉하여 산에서 내려가게 합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초막을 지어서 산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고자 하던 베드로의 선택은 틀렸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전례를 거행하되 전례를 통한 복음선포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9. 전례에는 말씀 전례만이 아니라 성찬 전례도 있습니다.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를 살아있게 하며 전례 이후의 행동을 방향 지어줍니다. 그래서 타볼산에서도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무르겠다던 베드로와 두 동료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 전례는 예수님의 행동적인 말씀입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고, 당신이 행한 모든 사랑을 계승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서 기운을 받아서 세상에 그 기운을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10.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가르침과 사랑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 가지로 간추려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과,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 그리고 서로가 공동으로 합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복음선포를 하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재촉하시며 세상 안에서 현존하시는 양식입니다. 이 현존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분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11. 돌이켜 생각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 가지 징표를 알아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율법을 모르며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기는커녕 율법을 좀 안다는 자들은 열 가지 계명으로 시작된 율법을 6백 가지도 넘게 방대하게 만들어 놓아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서 율법 지식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공동합의성 역시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사제와 최고의회는 증인도 확보하지 못한 한밤중에 졸속으로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고도 로마 총독의 권세를 빌려 죽임으로써 후환을 아예 없애고자 혁명당원들과 야합한 바리사이들의 꾀를 빌려서 종교적인 혐의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던 유다인들에게 민중봉기를 일으며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반란죄를 뒤집어씌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12. 그런데 교회는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시행착오로부터 얻었어야 할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나서야 지난 세월에 일어난 교회의 시행착오마저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서,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징표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양식으로 확정하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거룩한 변화의 요청입니다. 이 요청은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초대입니다. 교회의 상층부인 성직자들의 변화 없이 평신도들에게만 변화를 기대했던 노력은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전례 안에서만 거룩한 변화를 맛보려는 유혹이 우리 교회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유혹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하고, 그래서 교회는 위와 아래, 모두가 함께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려는 자발적 동기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변화를 전례 안에서만 맛보려 하거나 성직주의라는 종교의 산에 머무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일, 이것이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백합 > 오늘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0) | 2022.03.14 |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3.14 |
사순 제2주일 / 정진만 안젤로 신부 (0) | 2022.03.13 |
사순 제2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3.13 |
참된 예배와 올바른 제사 (0) | 202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