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 정의와 자비
레위 19,1-18; 마태 25,31-46 / 2022.3.7.;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의 복음은 최후의 심판 기사이고, 독서는 탈출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과는 또 다른 전승으로서, 계명을 지킴으로써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신을 일깨워주는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기록한 마르코 복음서를 이어 받는 한편, 가르침 일체를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마르코를 보충하여 다섯 설교로 스승의 가르침을 집대성해 놓았는데, 그것이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 설교(18장) 그리고 종말설교(24-25장)입니다. 종말설교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보잘것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베푼 자비야말로 당신에게 드린 사랑으로 간주하여 심판의 잣대로 삼고 그 의인들을 내세의 천국으로 가도록 판결하시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베풀었어야 할 자비를 거절한 이들은 악인으로 간주할 것이고 따라서 내세의 지옥으로 판결하실 것임도 덧붙이셨습니다.
이 같은 최후 심판의 현실은 최종 순간의 잣대로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맞이하게 될 최종 순간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현재 순간에 작동하는 것이며, 다만 이 작동 사실을 신앙이 있는 이들만이 의식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당신이 무상으로 먼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생명과 사랑의 자비를 인간이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노력으로 행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행위를 전제하지 않고 그저 자기 몫을 차지하는 것만을 정의로 간주하는 세상의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 하느님의 정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무상의 자비와 헌신을으로 나타나곤 함을 우리는 지나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동선이 훼손되어 공동체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면, 우리 민족은 의로움의 가치를 상기하곤 했습니다. 조선 중기에 나라의 머슴들인 왕과 대신들과 관리들이 나라 일을 소홀히 하고 외교와 국방마저 허술하게 내버려두는 바람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영남지방과 충청지방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경복궁마저 불태웠을 때 선조는 대신들을 데리고 의주까지 도망쳤지만, 스스로 의병임을 자처하고 왜적과 싸웠던 애국자들은 일반 백성이었습니다. 혹자는 그 중에 왜군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면천시켜준다는 법령 덕분이었다고 혹평하지만, 그렇더라도 천민 출신 노비들이 앞장서 싸운 덕분에 우리는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그 의로움을 치명으로써 증거했습니다. 고래로부터 하느님을 믿는 천손 백성임을 천주교 교리로 자각했던 이 신자들은 천주교를 박해하는 무신론적 성리학에 대항하여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 의로움을 넘어선 거룩함으로 진리를 지켜냈고, 이 진리에서 나오는 선한 영향력이 그 후대의 우리 민족을 마치 강력하고도 영적인 면역보호망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여 년 전에는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거족적으로 일으켰고, 이 여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정식 정부가 세워진 후에 전쟁이 일어나건, 가난과 독재로 억눌리건, 외환위기에 내몰리건, 바다가 검은 기름띠로 오염되건,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을 탄핵하여 촛불을 들건, 이 모든 국가 공동체의 위기에 선함과 의로움으로 무장하여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쓰는 전방위적인 한류의 밑바닥에는 이 선한 영향력이 매우 두텁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된 제국주의적 힘으로 한때 유행시킨 흐름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차원까지 다른 흐름이 지구촌 이웃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의 바이러스입니다.
문제는 해외에서만, 또 국내에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 이런 의로움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선 언급한 바, 민족 위기에 나타나는 의로움, 그리고 해외에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한류의 선한 영향력에 더하여, 평소에 나라 안에서도 도둑질을 하거나, 이웃을 갑질로 억누르거나,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지르거나, 동포에게 앙갚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 이런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갑절의 의로움을 자비로이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하는 거룩함이요 이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이처럼 의로움에 더하여 발휘되는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는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창조 때부터 의인들을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심판과 상급을 받기 이전에, 그 의로움과 거룩함의 행동이 실천되는 그때부터 세상 안에 천국의 영향력은 누룰 수 없는 힘으로 또 되돌릴 수도 없는 힘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악마는 온갖 핑계로 의인들이 이런 의로움과 거룩함을 피해서 달아나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으로 또 성찬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과 신앙의 뜨거움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악마도 이겨내지 못하는 천국의 영향력입니다. 선함, 의로움, 거룩함, 이 모든 가치를 더한 사랑이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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