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야 만다

수성구 2022. 3. 8. 03:18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야 만다

 

이사 55,10-11; 마태 6,7-15 / 2022.3.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우리가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으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이유나,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이유는 말씀과 성찬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사적 업적에 대한 증언이거나 이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 동안을 거치면서 수도 없이 많은 기록자들이 오로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여진 것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일어난 이후에 쓰여진 인간의 기록물 중에서 성경보다 정확하고 진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사이므로 그 품위가 종교적으로 최상위에 올려져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한결같이 봉헌되어온 이 성찬은 성체성사로서 한 치의 변경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업적을 기념하는 거룩한 기준이요 기점이 되어 왔습니다. 이 말씀과 성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 안에로 현존하여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작용 또는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하느님의 말씀이 돋아나게 할 싹과 맺을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게 마련이고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섭리를 먼저 전제하고 나서 생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도, 우리가 서로 맺는 인간관계도 이 기준에 따라서 행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업적의 결과이며, 그것도 무상으로 주신 선물인가 하면, 우리가 달라고 청하지 않았어도 먼저 주신 은총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주도성과 선물의 무상성 그리고 은총의 선행성이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인류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질서와 문명이 모두 이 전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인간의 몫입니다.  

 

  사순시기는 평소에 우리가 자칫 잊어버리고 살던 이 진리를 새삼 상기하는 때입니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자주 허물을 저지르는 우리가 이 세상 질서와 생명 질서의 원점이 되는 진리를 상기하면 주님의 기도 후반부를 실천으로 채우기가 조금은 더 쉬워질 듯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이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기도는 빈 말을 되풀이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종교는 이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절대적인 양심을 요청하며 이 속에서 하느님의 소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기본질서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하느님의 소명을 중시하지도 않은 채 빈 말로 기도를 해 봐야 그 어떠한 변화도, 단 한 사람의 성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종교 현실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시련이나 공동선의 위기에 대해서 선한 영향력에 이끌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정작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결과인 줄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올바르게 하느님께 이끌리도록 하자면, 종교인들이 먼저 절대적인 양심의 요청을 소홀히 하지 말고 귀하게 들어야 할 것이며, 그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양심의 절대적 소리를 듣고 이를 통해 하느님에게서 들려오는 소명에 충실하는 일, 이것이 교리 교육이나 입교 절차보다 더 중요하게 선행되어야 하는 선교적 노력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선한 영향력은 민족 사회에게로 퍼져나가고 있는 반면에,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이 종교적 형국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역사성이 지닌 엄중함을 강조한 이사야 예언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